[김미조의 고전 이야기] 어찌하여 제게 귀신을 짝지어 주셨습니까. | 뉴스로

[김미조의 고전 이야기] 어찌하여 제게 귀신을 짝지어 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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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저포기>, 김시습

김시습, 금오신화를 짓다.
매월당 김시습은 신동이었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의 뜻을 알았고, 만 3세엔 이미 좋은 시를 짓기 시작했다. 한번은 시습의 소문을 들은 정승 허조가 찾아가 “내가 늙었으니 늙은 노(老)를 넣어 시를 지어보라.”고 청했다. 그러자 아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老木開花心不老. 노목개화심불노)

겨우 만 3살인 아이가 썼다기엔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의 깊이가 참으로 깊다. 아이를 시험하려 했던 허조는 되려 아이로부터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그 2년 후엔 세종 대왕이 김시습을 알아보고, 훗날 크게 쓰이리라 예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습의 삶은 세종의 예견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그는 벼슬길에 오르는 대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거의 평생을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았다. 그 배경엔 계유정난, 단종의 폐위, 수양대군의 득세가 있다. 충신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고, 권문세가들의 백성들에 대한 횡포가 극심해지는 세상에서 관리로 사는 건 그의 강직한 성품에는 맞지 않았다.

방랑자 김시습이 그나마 오래 머문 곳은 경주 금오산(오늘날 남산)이다. 금오(金鼇)는 ‘금자라’를 뜻한다. 학자들이 <금오신화>를 김시습이 금오산에 머물렀을 때 썼을 것으로 추측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금오신화>는 기이한 이야기를 다룬 다섯 편의 소설이 실린 소설집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화’는 신이나 왕의 이야기를 다룬 신화(神話)가 아니라 한문 고전에서 혁신을 뜻하는 신(新)을 쓴 신화(新話)이다. 그런데 무엇이 새롭다는 것일까. 당시엔 중국을 배경으로 중국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판을 쳤었다. 그런데 금오신화는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금오신화는 우리 민족의 신화를 토대로 김시습만의 독특한 사상을 잘 표현한, 혁신적인 소설집이다.

또, 금오신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단편 한문 소설집’이라는 문학사적 위치를 점한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녔지만, 금오신화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금서가 되어버린다. 어떤 시대든 혁신적인 이야기는 지배층의 강력한 저항을 마주하게 되는데, 금오신화 역시 그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목 자체에 이미 ‘혁신’을 담고 있는 이 소설집은 당대 지배철학이었던 유학의 가치와는 맞지 않았다. 다섯 편의 소설엔 귀신, 염라대왕 등 인간이 아닌 자들이 등장하거나 용궁, 저승 등 인간 세상이 아닌 가상의 세계가 배경이 된다. 당시엔 귀신을 다룬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이를 배척하는 분위기였기에 금오신화는 유학자가 봐서는 안 되는 책으로 낙인찍혔다. 그렇다고 아무도 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하지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아서 당시에도 금오신화 판본을 몰래 구해 읽는 이들이 있었다.

금오신화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임진왜란으로 금오신화 필사본 대부분이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은 몇 권은 일본인이 훔쳐 가버렸기에 금오신화는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는 책이 되어버린다. 그러다 세상에 다시 등장한 건 사백 년이 훌쩍 지난 1927년이다. 육당 최남선이 일본에서 금오신화를 구해와 소개하면서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작가의 삶을 닮아 고난이 많았던 <금오신화>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취유부벽정기>,<용궁부연록>,<남염부주지>다. 이 중 내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만복사저포기>다. 그 이유는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 때문이다.

“뭐야, 이거. 그래도 부천데, 뒤통수를 이렇게 치나?”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은 대체로 인간에게 복을 주거나 징벌을 내리는 존재로 나타난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관장하기에 그의 권능은 무적이다. 적어도 이야기 속에서는. 그런데, <만복사저포기> 속 부처는 좀 남다르다.

당시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이야기, 만복사저포기
‘남원에 양 서생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잃은 데다 아직 장가도 들지 못한 터라 만복사(萬福寺)의 동쪽 방에 홀로 살았다.’

<만복사저포기>는 양 서생의 처지를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가진 것 하나 없이 홀로 사는 남자의 마음에 켜켜이 쌓이고 쌓인 외로움은 어느 날 결국 넘쳐 흐르고 만다. 가만히 있는 것으로는 답이 없다. 이에 양 서생은 부처에게 내기를 걸기로 한다.

“부처님. 제가 오늘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할까 합니다. 만약 제가 지면 불공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지신다면, 아름다운 배필을 구해 주십시오.”

이날은 3월 24일이었다. 젊은 남녀가 등불을 켜고 소원을 비는 풍속이 있는 날이다. 이른 아침부터 몰려든 젊은 남녀로 북적였던 불당은 저녁이 되자 텅 비어 버린다. 그제야 불당으로 들어선 양 서생은 다른 사람들처럼 부처에게 소원을 빌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수많은 이의 소원에 자신의 소원이 묻힐 수도 있겠다, 차라리 부처와 내기를 해 이겨버리자. 어찌 보면 얕기도 하고, 어찌 보면 대담하기도 한, 이 내기의 결과는 양 서생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제 부처가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양 서생은 불상 밑에 몸을 감추고, 부처가 이어줄 배필을 기다렸다.
잠시 후, 깨끗한 옷차림의 아리따운 여인이 불당 안으로 들어섰다.
‘설마, 저 선녀 같은 여인이?’
아마도 양 서생은 반신반의했을 것이다.
여인은 부처에게 향을 피우고, 깊은 탄식과 함께 자신의 사연을 풀어냈다. 여인이 살던 마을에 왜구가 침입한 탓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고생 끝에 가족 모두 무사히 만나기는 했지만, 여인은 부모의 뜻에 따라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홀로 3년을 살았다. 그 3년은 여인에게도 무척 외로운 시간이었다.
“그러니, 부처님. 배필을 정해주시어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한 지성으로 바라옵니다.”
여인은 축원을 바라는 글을 탁자 위에 놓은 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양 서생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불상 밑에서 뛰쳐나가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몇 마디 대화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그들은 부부의 연을 맺기로 한다.
부처는 양 서생의 약속을 지켰을 뿐 아니라 여인의 소원까지도 들어주었다.
양 서생은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승려들이 지내는 곁채 끄트머리의 좁은 판자 방에서 첫날 밤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나타난 시녀가 술상을 내어오고, 한 모금 마신 술의 향과 맛이 특별히 뛰어났기에 문득 ‘이게 현실인가.’ 싶었지만 더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다음 날, 만복사를 떠나 여인의 집으로 간 양 서생은 적잖이 놀란다. 매우 화려한 집 한 채가 다북쑥 우거진 들판에 덩그러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인간 세상이 맞나?’
의심이 똬리를 틀었지만, 이번에도 더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아내와 집이 있는 삶, 얼마나 절실하게 원했던 것인가. 괜한 의심으로 굳이 지금의 행복을 망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흘이 지날 즈음이다. 여인이 말했다.
“이곳의 사흘은 인간 세상의 삼 년과 같습니다. 서방님은 마땅히 집으로 돌아가셔서 생업을 돌보아야 할 겁니다.”

그제야 양생은 깨닫고 만다.
여인은 저처럼 살아 있는 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왜구가 쳐들어왔던 그 날, 여인은 정절을 지키다 그만 목숨을 잃고, 죽은 자로 이승을 떠도는 중이었다.
부처는 어쩌자고 살아 있는 남자에게 귀신을 짝지어 준 것일까.
약속을 지킨 것이라 하기에도 미진하고, 아니라 하기에도 미진하다.

부처는 왜 산 사람에게 죽은 사람을 짝지어 주었을까?
처음엔 웃었다.
‘와, 소원을 들어준답시고, 귀신과 짝을 지어주네.’
엉뚱하면서도 짓궂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양 서생에게 죽은 자를 보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만한 답이 나온다.
‘아! 신도 이루기 힘든 소원이었겠구나.’

양 서생이 살았던 시대는 15세기 중후반이다. 당시에도 가진 것 하나 없는 남자의 결혼이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양 씨는 유학을 공부하는 서생이다. 농사를 짓지도 못하고, 장사할 의지도 없다.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나가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오늘날 대학입시보다 더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는 과거에 합격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이런 처지를 부처도 빤히 아는데, 어디에서 누구를 구해 양 서생에게 소개해 줄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부처가 양 서생의 내기에 흔쾌히 응했던 것은, 같은 날 같은 소원을 지닌 여인- 비록 귀신이라 해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부처의 계산법에서는 산 자니, 죽은 자니 같은 건 하등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외로운 두 존재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더 나아가 서로의 한을 풀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괜찮지 싶었을 것이다.

물론 부처도 알았을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인연은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산 자와 죽은 자의 혼인 생활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 어느 곳에선가 짧은 시간만 유지된다. 곧 깨어날 꿈처럼 공간과 시간은 연속성이 없다. 이 때문에 그들의 혼인은 곧 문이 닫히는 가상 세계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그럼 두 남녀는 소원을 이루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일까.
꼭 그렇진 않을 것이다.
기억 때문이다.
둘은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 기억엔 현실과 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도 형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혹 거짓이라 해도 ‘기억’으로 존재하는 한, 그것은 그 사람의 의식 속에서는 진실이다.
여인은 소원성취 후,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났지만, 양 서생은 여인과의 기억을 가진 채 이 세상에 남았다. 그는 여인이 일러준 곳으로 가 그녀의 부모를 만나고 그간의 사연을 전한다. 하지만 그뿐. 양 서생은 홀로 지리산으로 들어가 평생 결혼하지 않고 약초꾼으로 살아간다.

그가 어디서 삶을 마쳤는지 아는 이가 없다.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젠 또 다른 의문이 든다.
만복사 동쪽 방에서 홀로 살았을 때의 외로움과 여인에 대한 기억만 가지고 살아야 했던 외로움 중, 무엇이 더 견디기 어려울까. 처음부터 가지지 못했기에 더 가지고 싶은 간절함과 가지고 나서 잃게 되는 상실감 중, 무엇이 더 사람을 힘들게 할까.
무엇보다 김시습은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한계임에도, 가상이 필요한 이유는?
현실이 고통스러우면 사람들은 다른 세상을 꿈꾼다. 그렇다고 이를 단지 ‘현실도피’로만 볼 수는 없다.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어서다. 진짜 절망엔 꿈이 없다. 무언가를 바라는 것엔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에너지마저 고갈되어 버렸기에 꿈조차 기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김시습은 꿈을 꾸는 이였다. 그리고 자신의 비석에 ‘몽사노(夢死老)’를 새기길 원했다.

몽사노- 꿈꾸다 죽은 늙은이

백 년 뒤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울 때,
꿈속에 살다 죽은 늙은이라 써 준다면
내 마음을 잘 이해했다 할 것이니,
천 년 뒤엔 이내 회포 알아나 주었으면.

김시습은 세상을 등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등진 것은 관리로서의 삶이었지, 사람을 만나고 소통했던 삶이 아니다. 그는 평생 바람처럼 거닐며 선비, 승려, 농민, 노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보았다. 유학, 불교, 도교의 철학적 이치를 책으로만 깨달았던 것이 아니라,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을 통해서도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백성들의 애환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수많은 시로 남기기도 했다.

<만복사저포기>에서도 당시 조선의 현실과 그 현실에서 고통받은 이의 사연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바로 여인이다. 여인은 왜구에게 죽임을 당해 버렸다. 평화로웠을 마을에 왜구가 침입해 칼춤을 추듯 휘저었던 그 현실, 삶의 꽃을 한번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가련한 백성. 김시습은 소설에서나마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싶었는지도 모른다.

꿈을 꾸다 죽은 노인은 금오신화를 남겼다. 오늘날 우리는 그가 남긴 소설들을 읽는다. 그중 한 소설에선 ‘끝이 정해진 부부생활’을 하는 남녀가 있다. 저 세상의 시간으로는 3일, 인간 세상 시간으로는 3년,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렇기에 비극적 결말이라는 팻말이 붙기도 했지만, 무엇이 중요한가. 둘은 원하는 바를 잠시나마 이루었고, 서로에 대한 기억을 가지게 되었는데.

*김미조 칼럼니스트
김미조는 소설을 쓰면서 인문학책을 기획, 집필하고 있다. 장편소설 『천국의 우편 배달부』로 데뷔했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집 『니는 혼자가 아이다』, 『빌어먹을 놈은 아니지만』 『피노키오가 묻는 말』, 수필집 『엄마의 비밀정원』, 인문서 『국제 분쟁, 무엇이 문제일까.』, 『10대와 통하는 자본주의 이야기』 등이 있다. 또, 포천 문화재단이 주관한 뮤지컬 『화적연-용신과 도깨비 공주의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김미조는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가 가능한 작가로, 앞으로도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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