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역사기행] 의서의 경전 동의보감 | 뉴스로

[이도국의 역사기행] 의서의 경전 동의보감

동의보감, 수록된 약재는 총 1천403종인데 그중 637종 약재에 한글 이름이 부기돼 있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전체 약재 중 당재(唐材·중국약재)는 102종에 불과해 대부분 약재를 우리 산야에서 구할 수 있었다.

동의보감은 조선 오백년사에서 가장 위대한 저작물 중 하나이다. 동아시아 최고의 의서로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 했고 한의학의 경전으로 대접받으며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간행됐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조선은 동의(東醫)의 나라로 우뚝 섰고 우리나라 과학문명사를 진일보시켰다. 알기 쉽게 만들어져 수많은 유의(儒醫,선비의사)가 고을마다 문을 열었고 약재 수요가 크게 늘어 대구, 전주, 원주 등지에 약령시가 생겼다.

전란 속에 만든 위대한 의서

임진병화가 아직 끝나지 않은 1596년, 선조는 58세 어의(御醫) 허준을 불러 난리에 불타버린 의서 편찬을 명한다. 허준은 어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정작 등과 집필을 시작했으나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 뿔뿔이 흩어지고 허준 혼자서 집필을 계속한다. 그 후 선조 승하 문제로 허준이 평안도 의주로 유배를 당하자 귀양살이 1년 8개월 동안 의서 집필에 진력하여 마침내 1610년에 25권 25책의 동의보감을 완성하여 광해군에게 올린다. 그의 나이 72세로 시작한지 14년 만이다.

광해군은 크게 치하하고 1613년 내의원에서 목활자로 동의보감을 간행하게 한다. 임란 후 새로 지은 4대 사고(史庫)에 실록과 함께 보관된 이 초간본이 오늘날 국보 319호이고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다. 선조와 광해군은 역사상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지 못하지만 전란 중에 의서 편찬을 명하고 전란 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실록을 재정비하고 의서를 발간하여 후세에 물려준 점은 대단한 치적이다. 또 허준의 능력을 일찍 알아보고 서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종1품 숭록대부의 품계를 내렸다.

영영본과 완영본

동의보감은 내의원 초간본 비롯하여 10여종 판본과 부녀자를 위한 한글 필사본이 남아있다. 경상감영과 전라감영에서 각각 두어 번 목판을 판각했는데 경상감영 간행본이 영영본(嶺營本), 전라감영 간행본이 완영본(完營本)이다. 경상감영은 1659년 효종 때 기해영영본을 처음 판각했고 100년 뒤 1754년 영조 때 갑술영영본을 재각했다, 아울러 직지사본이 있으니 절집에서도 요약본을 간행했다.

전라감영 완영본은 1648년경에 초판을 판각헀고 1711년 수정본, 1814년에 목판본을 재각했으며 현재 전주향교에 책판이 보관돼 있다. 그리고 일반 보급을 알 수 있는 선비 서간이 남아있는데, 1810년 순조 때 동국지도를 만든 호남의 실학자 하백원이 동문 안수록에게 보낸 편지에, 전라감영에서 동의보감을 찍으려고 하니 한 질 구하려고 하면 종이 값을 보내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일반 보급은 더딘 듯하다. 또한 경주의 경주이씨 문중과 고창의 평해황씨 종가에서 동의보감을 소장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으니 조선후기 큰 문중에서 문중별로 동의보감을 한 질 소장한 듯하다.

일본으로 건너간 기록도 남아있다. 해외한국학 자료에 의하면 교토 동양문고에는 무술영영본이, 오사카 니가노시마 도서관에는 1814년 갑술완영본과 1839년 기해영영본이 소장돼 있다. 이렇듯 한번 인각으로 백 년 동안 찍어냈고 완전히 파손되면 다시 판각했다.

해외에서 수십 회 발간과 극찬

명말청초에 중국으로 건너간 동의보감은 최고 의서로 인기를 끌었다.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반드시 가져가는 물품이었고 1720년 경종실록에 중국 조정에서 조공 물품으로 동의보감을 보내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에서 첫 간행은 1763년 건륭제 때 만든 벽어당본이다. 중국내 동의보감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라 10여년 만에 한번 씩 간행했고 1991년까지 중국 26회, 대만 6회로 총 32회를 발간했다. 중국역사상 동의보감보다 더 많이 간행된 의서는 서너 점에 불과하다. 구한말에는 중국판이 국내로 유입돼 종로에서 팔기도 했다.

청나라 학자 능어(凌魚)가 쓴 1766년 건륭 계미간본 서문에, “동의보감은 황제가 인정한 국수(國手,나라名醫) 의서로 궁중비각에 보관돼 있어 그동안 베껴서 사용했으나 금번 천하에 널리 전하고자 판각하니, 병든 생명을 건지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천하의 보배는 의당 천하와 함께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도 중국판 동의보감이 등장한다. 연암이 1780년 사행사를 따라 북경과 열하에 갔을 때 서점에서 중국본 동의보감을 팔고 있었다. “그동안 매양 병이 나면 사방 이웃으로 돌아다녀 보감을 빌려보았기에 이를 구입하려고 했으나 은 닷 냥을 변통할 길이 없어 서운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라고 열하일기에 썼다. 18세기 중국에서 동의보감 한 질 값은 은 닷 냥이었나 보다.

1662년경 일본으로 건너간 동의보감은 1724년에 에도 바쿠후 지시로 ‘정정동의보감’이라는 이름으로 교토에서 처음 발간됐고 1799년에는 오사카에서 오사카본이 발간됐다. 동의보감은 에도 바쿠후 이후 일본 의사의 필독서가 됐다. 오사카본이 중국 강남으로 건너가 쑤저우본의 저본(底本)이 되고 다시 베트남으로 넘어가 베트남 의서에 동의보감이 등장한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동아시아 최고 의서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교토본 발문(跋文,에필로그)에, 일본의 유명 의사 미나모토미치(源元通)는 “조선의 허준은 중국 편공(편작과 창공)같은 의성(醫聖)이며 동의보감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신선이 쓴 경전이요 의가의 비급”이라고 극찬하면서 이로써 “치료의 표준이 만들어졌다.”라고 했다.

허준 영정

한의학의 경전으로 우뚝 서고

동의보감은 지었다기보다 찬(纂)했다고 한다. 중국 한나라부터 명대까지 이백여 의학 문헌과 향약집성방 등 유명 의서가 허준이라는 용광로에 녹아들어 동의보감이라는 위대한 저술로 탄생됐다. 사상의학의 이제마는 동의보감이 나옴으로써 비로소 동양의학이 확립됐다고 했다. 이후 제중신편, 방약합편 같은 의서는 모두 동의보감에 바탕을 두었고 보감은 한의학의 경전으로 우뚝 섰다.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의 다섯으로 나뉘어 편찬된 동의보감은 질병 분류 체계를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모든 인체 병증을 일목요연하게 알기 쉽도록 정리하여 누구나 쉽게 처방을 구할 수 있는 독자(讀者) 위주의 의서였다. ‘책을 펼치기만 하면’ 훤히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로부터 수많은 선비의사가 탄생하여 백성의 병을 맡았다. 아울러 우리 몸을 작은 우주라 했다. 우주의 대순환이 순조롭듯이 우리 몸의 기(氣) 흐름을 원활히 하는 양생(養生)을 중요시 했다. 양생은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것으로 의학과 양생을 하나로 묶었다. 그래서 병을 고치려면 먼저 마음을 고쳐야 한다고 욕치기질(欲治其疾)이면 선치기심(先治其心)이라 했다.

동의(東醫)의 동은 동국, 동방처럼 우리나라를 나타내고, 보감(寶鑑)은 보배로운 거울로 만물을 환히 비춰서 그 형태를 놓치지 않는다는 뜻임을 내경 편에 밝혔다. 400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 한의대에서 교재로 쓰고 있으며 보감학파라 하여 동의보감을 연구하고 따르는 큰 한의학 흐름이 있고 침구학은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정규과목으로 채택했다.

*이도국 칼럼니스트
이도국은 전국 방방곳곳을 돌며 역사를 찾아 비교분석하고 한국사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쓰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여행작가이자 역사연구가다. 이도국은 영남일보에 3년간 ‘영남좌도 역사산책’ 연재하며 지역 향토 사학에도 몰두했다. 『히말라야 언저리를 맴돌다』, 『영남좌도 역사산책』의 저자다. 현재 한국사 강의 등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지역 경제를 중심으로 평생학습의 장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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