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조의 고전 이야기] 이 원수, 가난 귀신아. 어떻게 해야 떨어져 나갈 거니? | 뉴스로

[김미조의 고전 이야기] 이 원수, 가난 귀신아. 어떻게 해야 떨어져 나갈 거니?

[편집자주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시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칼럼입니다사회적 자본인 지식과 경험·노하우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입니다본 코너는 종횡무진포럼·가디언·펄스㈜·한가향’이 공동후원 합니다.

-탄궁가(嘆窮歌), 정 훈.

너, 의리가 없구나. 어떻게 나를 버리려 하니?
가난 귀신은 마음이 상하고 말았다. 아니,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부아가 치밀고 속이 뒤집힌다. 뭐래. 지금 이 작자가 뭐라는 거야. 가난 귀신은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희로애락을 너와 함께 하여
죽거나 살거나 헤어질 줄이 없었거늘
어디 가서 뉘 말 듣고 가라고 말하는가.”
-탄궁가

이 말을 들은 정훈은 흠칫 놀란다.
아! 어!
그, 그랬니……. 생각해보니……. 그, 그런 것 같기도…….
정훈은 바로 직전 자신의 행동과 가난 귀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한다.
내, 내가 잘못했네.

가난 귀신은 왜 화를 냈을까.
정훈의 아버지인 정금암의 지위는 능참봉이었다. 참봉에 ‘능’을 붙인 건, 선왕과 선후의 왕릉을 관리하는 참봉이기 때문이다. 참봉은 종9품 최하위 문반직으로 녹봉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을까. 꼭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가난 귀신은 정훈에게 ‘어려서부터 너와 함께 하여’라고 말했으니 정훈의 아버지 역시 경제 형편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정금암은 최하위 문반직이나마 관직을 맡기라도 했지만, 정훈은 단 한 번도 관직에 나간 바가 없다. 그러니까 정훈은 살아 있는 동안에 돈을 번 적이 없다.

가난 귀신이 정훈을 떠나지 않고 계속 붙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유야 어떻든 가난 귀신을 좋아하긴 어렵다. 그는 여러모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가 있는 동안엔 입에 들어가는 것도 없고, 제대로 걸칠 것도 없다. 초라한 행색에 배를 곪고 있는 양반, 그게 바로 정훈의 현실이다. 절로 탄식이 나온다. <탄궁가>는 가난하여 살기가 어려움을 탄식하는 가사다.

하늘이 만드심을 일정 고루 하련마는
어찌 된 인생이 이다지도 괴로운고.
삼십 일에 아홉 끼니 얻거나 못 얻거나
십 년 동안 갓 하나를 쓰거나 못 쓰거나
(중략)
집 안에 들어가 씨앗을 마련하니
올벼 씨 한 말은 반 넘게 쥐가 먹었고
가장 피 조 팥은 서너 되 부쳤거늘
춥고 주린 식구 이리하여 어이 살리.
(중략)
환곡 장리는 무엇으로 장만하며
부역 세금은 어찌하여 차려 낼꼬.
이리저리 생각해도 견딜 수가 전혀 없다.
-탄궁가

온 가족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날이 잦다. 궁한 와중에 파종할 볍씨 한 말을 마련했건만, 그건 또 쥐가 반 넘게 먹어 치워 버렸다. 나라에 진 빚과 이자를 갚기도 힘든데 부역 세금까지 내야 한다. 생각할수록 갑갑하고 환장할 노릇이다. 이젠 죽기 살기로 가난을 벗어나는 것만이 답이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정훈은 가난 귀신과의 이별식을 계획한다.

이 원수, 이 가난 귀신과 어찌해야 이별하겠나.
술에 음식을 갖추어 이름 불러 전송하여
좋은 날 좋은 때에 사방으로 가라 하니.
-탄궁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좋은 술도 아니고, 셋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난 음식도 아니다. 그래도 궁핍한 살림에 제 나름대로 정성을 끌어모아 차린 상이다.
“이 원수야. 이젠 우리 헤어지자. 내가 배웅해줄게. 응? 그러니까 너는 네 갈 길로 가려무나.”
정훈은 나름대로 가난 귀신을 달래가며 말한다. 그냥 가라고 하면 괜한 심통을 부릴까 걱정해서다. 그런데 어떻게 말하든 ‘내 곁을 떠나라’는 게 본질이다. 가난 귀신은 말귀를 못 알아들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눈앞의 술과 음식에 현혹되지도 않는다.
“네가 어떻게! 나를 배신해?”
가난 귀신은 참지 않는다. 어려서 지금까지 함께 했더니, 응? 죽을 때까지 헤어질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응? 누가 너와 나를 이간질해서 나를 쫓아내려 하는 거니? 응? 말해봐.

(가난 귀신이) 우는 듯 꾸짖는 듯 온갖 말을 하거늘.
-탄궁가

세상이 날 버려도 너는 내 옆에 있어 주었네.

도리어 생각하니 네 말이 다 옳도다
무정한 세상은 다 나를 버리거늘
너 혼자 신의 있어 나를 아니 버리나니
일부러 피하여서 잔꾀로 헤어지겠느냐.
-탄궁가

정훈의 말에 가난 귀신은 어느 정도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세상이 나를 버려도 너는 내 옆에 있어 주었구나. 네가 신의가 있어 그렇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까. 아마도 나라면 이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세상이 나를 버렸을 때, 너도 나를 버리지 그랬어. 신의는 왜 지키니? 그러지 말지.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세상에서 돈이 없다는 건 사회적 생명장치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가난 귀신이 ‘죽거나 살거나 헤어지지 말자’고 내게 말했다면, 나는 깊은 절망에 빠져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뭘 해도 가난 귀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니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더 이상하다. 하지만 조선 시대 양반 정훈은 그러기는커녕 덤덤히 말한다.

하늘이 준 이내 가난 설마한들 어찌하리.
빈천도 내 분수니 서러워하여 무엇하리.
-탄궁가

안분지족, 그 흔한 세계관
탄궁가는 가사다. 가사는 시조와 함께 조선 시대 쌍벽을 이루었던 문학 장르다. 그런데 가사는 좀 묘한 구석이 있다. 형식은 4음보로 된 운문인데, 내용은 서사적 성격을 띤 산문이다. 3.4조의 연속체로 4음보만 지킨다면, 그 길이가 장편소설처럼 길어도 상관이 없다. <연행가>, <일동장유가>와 같은 기행가사가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주제는 시조와 겹친다. 가사도 양반 계층의 문학이어서다. 가사나 시조에서 자주 다루는 주제 중엔 ‘강호한정(江湖閑情)’이 있다.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을 즐기는 강호한정은 당시 양반들이 지향하는 삶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강호한정 끝엔 곧잘 ‘안분지족(安分知足)’이 놓인다. 최초의 가사로 알려진 정극인의 ‘상춘곡’도 그러하다.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을까. 단표누항에 허튼 생각을 아니 하니.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한들 엇지하리.
-상춘곡, 정극인.

안분지족은 ‘편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하는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니 다른 것에 욕심내지 않고, 지금에 만족하겠다고 말하는 정극인의 ‘안분지족’은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훈은 자연을 즐기고자 속세의 모든 것을 내려두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치 않았던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그 끝엔 ‘안분지족’이 있다. 이 같은 흐름은 박인로의 <누항사>에서도 보인다. <누항사>는 임진왜란에서 수군으로 참전한 박인로가 집으로 돌아온 후에 마주한 가난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가사다. 누항사에서 표현한 가난은 탄궁가보다 더 구구절절하다. 초라한 행색으로 걸어가는 저를 보고는 개만 짖어댄다는 표현까지 쓸 정도다. 그 끝 역시 안분지족이다. 정훈이나 박인로의 안분지족은 ‘자기 위안’일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의 ‘안분지족’은 수동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안분지족’ 자체가 ‘수동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고통에 잠식당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우울과 체념에 시달리는지를 떠올려 본다면.
‘고통스러워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차라리 가난을 내 팔자라 받아들이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정훈은 고통에 잠식당해 절망하기보다 담담히 살아 나가기를 선택한다. 끈덕지게 붙어 있는 가난 귀신을 미워하기보다 친구삼기로 한다. 이왕이면, 안분지족. 이렇게 마음먹는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마음은 건강하게 지킬 수 있을 테니. 또, 마음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하니. 실제로 그는 오래 살기도 했다. 1563년에 태어나 1640년에 죽었으니, 그의 나이 78세.

*김미조 칼럼니스트
김미조는 소설을 쓰면서 인문학책을 기획, 집필하고 있다. 장편소설 『천국의 우편 배달부』로 데뷔했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집 『니는 혼자가 아이다』, 『빌어먹을 놈은 아니지만』 『피노키오가 묻는 말』, 수필집 『엄마의 비밀정원』, 인문서 『국제 분쟁, 무엇이 문제일까.』, 『10대와 통하는 자본주의 이야기』 등이 있다. 또, 포천 문화재단이 주관한 뮤지컬 『화적연-용신과 도깨비 공주의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김미조는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가 가능한 작가로, 앞으로도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뉴스제보 jebo@newsro.kr

<©국가정보기간뉴스–뉴스로,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뉴스로 주필ㆍ칼럼리스트


circular-profile-leehosun
circular-profile-jeon
이기원-칼럼하단-바로가기-원형
이도국-역사기행-칼럼하단-바로가기-원형
circular-profile-kimchangsik
circular-profile-kim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