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역사기행] 천년 왕조의 원동력, 과거 | 뉴스로

[이도국의 역사기행] 천년 왕조의 원동력, 과거

고려 광종 때(958년) 처음 실시한 과거제도는 갑오개혁(1894년)으로 폐지될 때까지 천년 사직과 함께 했다. 백성의 출세 사다리였고 인재의 순환 통로였다.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과거로 등장했고 역사의 한 축이 되어 왕조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됐다. 급제자에게 나라에서 내리는 연회를 은영연(恩榮宴)이라 했고, 급제자 집안에서 벌이는 잔치를 용문에 이르렀다고 도문연(到門宴)이라 불렀다. 세 아들이 과거에 오르면 그 어머니에게 잘 키웠다고 늠록(廩祿)을 주었고,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오르면 오자등과댁이라 칭송했다. 하지만 급제와 보임은 별개였다. 과거는 과연 양반계층의 전유물이었을까.

소과와 대과(문과)
‘계사년 춘삼월에 소과합격하고 이듬해 식년시에 대과급제하여’ 같이 옛글에 소과합격과 대과급제가 한 문장으로 나오니 소과를 대과의 1차 시험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소과는 1차 시험이 아니라 염연한 과거이다. 글공부하는 유생은 많고 벼슬자리는 한정돼 있으니 대과로 관리를 뽑고 소과는 성균관 입학자격과 명예를 주었다.

소과와 대과의 1차, 2차 시험이 초시(향시), 복시(회시)이고 3차 시험인 전시(殿試)는 대과에만 있었다. 대과는 유생 신분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어 조선후기 대과급제자의 80%는 소과 없이 대과만 합격했다. 대과에 합격하면 홍패를, 소과에 합격하면 백패를 주었다. 패는 교지(敎旨)이다. 대과합격자 명부가 국조방목, 소과합격자 명부가 사마방목이다. 3년마다 열리는 식년시(자·묘·오·유년의 정기과거)와 증광시(경축과거)에 함께 실시됐다.

대과는 초시 240명, 복시 33명을 뽑았고 소과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뉘어 각각 초시 700명, 복시 100명을 뽑았다. 소과 합격자를 허생원, 박진사와 같이 벼슬처럼 불렀다. 초시는 각 도에서 친다고 향시라 했고 합격자수를 지역별로 안분했으며 합격자를 마찬가지로 벼슬처럼 불렀다. 황순원 단편소설 소나기에 윤초시가 나온다.

대과는 어려운 시험이니 소과만으로 나라에서 인정하는 인물로 대우받고 사회적 명망을 누렸다. 합격자 평균연령도 소과가 높았으며 향교, 서원의 청금록(유생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향촌 유림을 이끌었다. 소과를 사마시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중국에서 관리 천거인물을 대사마라 하는데 연유했다. 또 감시와 동당시가 짝인데 감시(監試)가 소과, 동당시가 대과이다. 대과 과거장이 동당(東堂)이다.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소과 229회, 대과 500여회 열렸으며 합격자 수는 소과가 4만5천명, 대과가 1만5천명이다. 별시(정시·춘당대시·알성시)는 대과만 열어 적은 인원을 뽑았다. 집안이 명문가문임을 내세울 때 <대과14장 소과66장>처럼 소과도 대단하게 여겼다. 벼슬살이는 항상 위험이 뒤따라 진사 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는 유명(遺命)도 있었다.


이순신의 1576년 무과 급제 교지

무과와 잡과
무과는 조선 초부터 실시됐다. 선발인원이 통상 28명인데 많이 뽑을 때도 50명 내외였다. 그런데 갑자기 수천 명을 뽑는 별시가 더러 있었는데 이는 긴급 군병모집 과거였다. 나라가 위급할 때 전투력을 강화하고자 신분을 불문하고 무예에 능한 군병모집에 무과과거를 활용했다.

군병모집 무과는 임진란 때 황해도 행재소 별시, 광해군 때 강홍립의 만주 출정 군병모집,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산성무과, 숙종 때 청나라 삼번의 난에 실시한 만과(萬科) 등이 있었다. 이러한 특별무과를 제외하면 문과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국조방목에 수록된 무과급제자 수도 3만 명이다.

무과에는 서자는 물론 천인도 면천되면 응시할 수 있으므로 신분상승 기회가 주어졌고 문반 우위의 조선 오백년 왕업에 무반 반란이 한 번도 없었다. 충효를 중요시한 성리학을 일찍부터 배웠고 주로 변방을 지키는 고된 업무이지만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으며 세종 이래 국토가 한 뼘도 줄지 않는 것도 무반의 공이 컸다.

잡과는 기술직 과거인데 역과(통역), 음양과(천문), 의과(의술), 율과(법률)이다. 식년시와 증광시에 함께 실시됐고 각각 10명 미만을 뽑았다. 중인이 주로 응시했으며 정3품 당하관까지 승진했다. 역과 출신인 역관은 중국어, 일본어 통역을 담당했는데 세습 집안이 많았다. 때로는 당상역관이 돼 역사무대에 등장하기도 했다. 1712년 백두산 천지 남쪽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울 때 국경을 실측한 인물은 역관 김경문이었고, 천주교 신도로 밀양에 유배돼 최초로 희생된 김범우와 개화기 선각자 오경석도 역관 출신이다.

조선시대 문과 답안지. 상주 조정종가 문적으로 보물 문화재. 〈상주박물관 소장〉

과거 시험문제
과거 종이를 명지(明紙)라 하며 응시자가 준비했고 붓, 벼루와 함께 과장으로 가져갔다. 생원시는 경전 지식을, 진사시는 시부 짓기였고, 문과는 대책을 묻는 논술이었다. 문과시험은 무척 까다로워 백지 답안이 많았다. 문과 문제로 세종은 윤대(輪對,신하와 국왕만남)시 신하들이 서로 이간질하는 것을 막을 방법을 물었고, 세조는 북쪽 변방 인구는 줄고 남쪽 인구는 늘어나는데 효율적인 나라 대책을 제시하라며 오늘날 고민거리를 오백년 전에 출제했다.

숙종 때 경상도 영양 주실마을의 조덕순은 1690년 식년시를 보기위해 한양으로 올라와 도성 사람들에게 지금 가장 급선무가 무엇인지를 물으니 모두 도둑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했다. 그는 며칠 동안 곰곰이 대안을 생각했는데 과거시험에 도적 해결방안이 출제됐다. 조덕순은 어느 시대인들 도둑이 없고 어느 나라인들 도적이 없으랴만, 그것을 다스리는 법이 세대마다 같지 않다며 법집행의 엄정함보다 교화라고 하는 인정(仁政)을 근본 처방으로 제시하여 장원급제했다.

급제와 보임
어렵게 대과 급제하여 향리에서 도문연을 열고 유가(遊街,고을행진)를 벌이며 가문의 영광이라 했지만 보임은 별개였다. 급제자는 계속 배출되고 관직 자리는 한정돼 있으니 두어 번의 임기가 끝나면 더 이상 보직을 받지 못해 대부분 낙향했다. 영조 전후 경상감사를 지낸 조태억과 유척기는 영남에는 문과급제자가 90~100명이나 있지만 겨우 한 고을 살고는 더 이상 보임을 받지 못해 초야에 묻혀 울분을 삼키고 있다고 조정으로 서계를 올리기도 했다. 힘없는 급제자는 보직을 맡지 못해 녹봉이 없었고 이를 벼슬 운이 없다고 하며 하늘의 뜻으로 여겼다.

역사적 인물과 오자등과댁
고려시대부터 역사적 인물은 대부분 과거로 등장했다. 강감찬, 서희, 윤관, 김부식, 이규보, 안향, 이제현, 문익점, 정몽주, 정도전은 모두 문과 급제자였고, 고려와 원나라 과거에 모두 급제한 인물은 이곡·이색 부자를 비롯하여 10여명이 나왔다. 고려시대 문관 벼슬의 최고 선호직은 과거시험관으로 급제자들은 그를 좌주(座主)라 부르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또 다섯 아들이 과거급제한 집안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하여 크게 우러러 보는데, 낳아 키우기도 힘들거니와 모두 급제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선조 때 문장가 김시양은 자해필담에서 오자등과 집안으로 여말에 단양우씨 우현보, 세종조 순흥안씨 안관후, 전의이씨 이예장, 성종조 광주이씨 이극배, 중종조 함양박씨 박홍린, 선조조 남원윤씨 윤서 집안이라고 하면서 그 집안 터를 명당이라고 했다.

조선후기 과거급제자의 50%가 양인 출신으로 신분이동이 역동적이라는 최근의 연구 결과가 나왔고 18세기부터 서얼에게도 문과과거 문이 열렸다. 실제로 한미한 가문에서 등과하여 동량재가 된 인물이 무척 많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750여 가문에서 문과급제자가 나왔다. 어느 제도인들 폐단이 없으랴만 과거는 나라에 새로운 인재를 공급하여 역사를 순환시켰고 고려·조선 왕조가 천년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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