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원의 생각의 추(追)] 우리 각자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히자 | 뉴스로

[이기원의 생각의 추(追)] 우리 각자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히자

몇 년 전에 흥행한 영화가 있었다. 원전사고를 다룬 ‘판도라’다. 대한민국 사상 최대의 강진에 이어 원전사고까지 찾아온 초유의 재난 앞에 한반도는 큰 혼란에 휩싸이고, 컨트롤 타워마저 사정없이 흔들린다. 최악의 사태를 유발할 2차 폭발을 앞두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대통령이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사태는 수습국면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미 시기를 일실하여 심각한 상황에 도달하게 되고, 결국 발전소 현장 직원들이 목숨을 걸고 대처함으로써 최악의 사태는 막게 된다.

주요 내용이 너무 과장되고 정말 비현실적이긴 했지만, 사고의 정도를 축소한다든지 상황에 대한 보고를 묵살하는 등의 장면에서는 재직할 때의 몇몇 에피소드들이 생각나 쓴 웃음이 나오곤 했다. 후반부로 가면서, 발전소 현장 직원들이 “죽으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리러 들어가는 것이데이!”라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발전소로 들어가는 살신성인의 희생정신과 가족에 대한 인간애 등에서는 가슴이 찡해지는 감동을 받기도 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제왕 제우스가 인간에게 재앙을 내리기 위해 다른 신을 시켜 흙으로 만든 인류 최초의 여자다. 상자를 열어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판도라가 호기심에 상자를 열게 되어 상자 속에 있던 나쁜 것들이 인간 세상에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이에 놀란 판도라가 급히 뚜껑을 닫았지만 속에 있던 불행과 질병, 고통 등 온갖 해로운 것들이 다 빠져 나온 뒤였고, 남은 것은 오로지 상자 바닥에 깔려 있던 희망뿐이었다.

잠시 생각해 본다. 우리 각자의 가슴 속에도 ‘판도라의 상자’가 있지 않겠는가. 그 상자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 있을까? 우선 영화에서도 나온 것처럼 다른 사람이나 국가가 어떻게 되든 자신과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있을 것이다. 제도와 매뉴얼이 있는 데도 ‘설마 괜찮겠지’하면서 대충 했다가 위기가 코앞에 닥쳐서야 정신을 차리는 안전불감증, 쉽게 달아올랐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냄비근성도 상자 깊숙이 자리잡고 있음이 틀림없다. 대개 자칭 엘리트라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오만과 다른 사람의 의견이야 어떻든 자기 생각대로만 밀어붙이는 독선도 적잖이 숨어 있지 않을까.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비굴함,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실패했을 때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비겁함,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핑계를 대며 신의를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행태 등 부끄러운 것들이 정말 많을 것이다.

전국 교수들의 모임에서 매년 12월 그 해의 사건과 시대상을 바탕으로 사자성어를 발표하는데, 2023년의 사자성어로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다’라는 뜻의 ‘견리망의(見利忘義)’를 꼽았다. ‘견리망의’를 추천한 김병기 교수는 “지금 우리사회는 이런 견리망의의 현상이 난무해 나라 전체가 마치 각자도생의 싸움판이 된 것 같다”며, “정치란 본래 국민을 ‘바르게 다스려 이끈다’는 뜻인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인은 바르게 이끌기보다 자신이 속한 편의 이익을 더 생각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분양사기와 전세사기, 보이스 피싱, 교권침해 등에 대해서도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이 정당화되다시피 해 씁쓸한 사기 사건도 많이 일어났고, 당장 내 아이의 편익을 위해 다른 아이나 선생님의 피해를 당연시하는 사건들이 많이 보도됐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필자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각자 반성하면서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경구(警句)일 것이다.

2024년 새해가 되었다. 일본의 소설가 모리사와 아키오는 그의 작품 ‘당신에게’에서 “과거와 타인은 바꿀 수 없어도 미래와 자신은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우리는 정치적인 혼란은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적인 갈등 등 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많은 난제들을 안고 있다. 그런데,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어려울 때마다 뭉치고 지혜를 발휘해서 그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해 왔다. 지금이 바로 그래야 할 ‘골든 타임’이라 생각한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 상자 속에 있던 나쁜 것들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지만, 우리 마음속에 그처럼 나쁜 것들이 가득 찬 ‘판도라의 상자’는 오히려 활짝 열어젖혀 배출시켜버려야 할 것이다. 버려야 채울 수 있다. 비워진 상자 속을 제각각 건전한 생각과 행태들로 가득 채운다면 서로 신뢰하고 돕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경제지표만 좋아진다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의식과 제도의 선진화를 통해서 지금 겪고 있는 이 위기를 선진국 도약의 기회로 전환시켜야 한다. 우리 가슴 속 ‘판도라의 상자’ 안에는 아직도 ‘희망’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그 희망을 불씨로 삼아 국민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뉴스제보 jebo@newsro.kr

<©국가정보기간뉴스–뉴스로,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뉴스로 주필ㆍ칼럼리스트


circular-profile-leehosun
circular-profile-jeon
이기원-칼럼하단-바로가기-원형
이도국-역사기행-칼럼하단-바로가기-원형
circular-profile-kimchangsik
circular-profile-kim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