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역사기행] 조선의 으뜸관리, 영의정 | 뉴스로

[이도국의 역사기행] 조선의 으뜸관리, 영의정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영의정을 지낸 이는 160명이다. 그중 89명이 두 번 이상 역임했고 69개 가문에서 영의정이 나왔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렀지만 권신이나 탐관은 없었으며 온화한 인물이 많았고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했다. 어린 왕이 즉위하면 원상(院相)이 되어 보필했고 나라가 어려울 때는 국난 극복에 앞장섰다. 허약한 군주아래 오백년 왕업을 유지한 것은 훌륭한 영의정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조선후기 영의정 관복, 금관조복이라고 하며 헌종 때 영의정 경산 정원용의 관복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조선의 영의정
영의정은 조선왕조의 으뜸관리이다. 고려시대에는 문하시중이라 불렀으며, 한미한 가문에서 등과하여 본인의 능력으로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 많다. 가장 오랫동안 역임한 이는 세종 때 황희로 18년간 지냈고, 가장 젊은 나이에 오른 이는 선조 때 이덕형으로 42세였다. 북인의 영수 정인홍은 가장 고령인 82세에 영의정이 됐다. 5번 이상 영의정에 오른 인물은 이원익, 정태화, 최석정, 김상복 등이고 부자·조손 영의정이 나왔다.

태평성대 영의정은 큰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역사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나라가 어려울 때는 국정 전면에 섰다. 중종반정 후 혼란기를 극복한 정광필, 임진란의 명재상 류성룡, 전란복구에 진력을 다한 이항복과 이덕형, 병자호란의 굴욕을 참고 나라 기틀은 지킨 최명길, 대동법의 재상 김육, 대기근 극복에 앞장선 정태화와 최석정, 영·정조시대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김재로, 김상복, 채제공 등은 당대의 명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에서 문과급제자를 낸 750여 씨족 가운데 영의정을 배출한 씨족은 69개 씨족이다, 그중 2명 이상 배출한 가문이 31개, 3명 이상 배출한 가문이 21개이다. 이는 왕조 후반기 이백여년을 노론이 장기 집권했기 때문이지만 그 속에서 최상의 인물이 영의정에 올랐다.

영의정 류성룡의 향리, 안동 하회마을, 안동시청 제공

청렴한 영의정
조선왕조 160명의 영의정에 대해 권신이나 탐관으로 평가받는 인물은 없었고, 대신 청렴한 인물들이 왕조 전 시기에 걸쳐 나왔다. 청렴은 국초 이래 중요한 덕목이므로 청백리에 녹선되거나 실록에 청렴하다고 기록된 영의정이 20여명이나 된다. 조선초기 황희, 구치관, 정창손, 김전, 상진, 이준경 등이 그러하며, 중기에는 홍섬, 박순,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홍주, 이시백, 홍명하 등이 있고, 후기에는 정호, 김재로, 서지수, 김상복, 심환지, 정원용 등이다. 사관들은 실록에 이들의 졸기(卒記,죽음알림기록)를 쓰면서 일국의 영상이었지만 청렴 검소하게 살았다고 기록해 후세에 전했다. 일생을 청백하게 살면서 당론에 대해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기에 당파싸움은 그렇게 치열했다.

대기근 극복에 앞장선 영의정
조선은 두 번의 대기근을 겪었다. 1670~1년 현종 때 경신대기근과 1695년 시작된 숙종 때 을병대기근이다. 백성들은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했고 굶어죽은 사체가 길거리에 즐비했다. 현종은 ‘나에게 허물이 있는데 어째서 백성에게 재앙을 내린단 말인가’하며 통곡했다. 영의정 정태화는 비축미와 군량을 동원하여 영남 곡식을 관북으로 보내고 황해도 세미로 호서를 구휼하는 등 국난 극복에 진력을 다했다.

연이어 닥친 을병대기근에는 구휼할 비축미마저 없으니 더욱 참혹했다. 이때 영의정은 남구만, 유성운, 서문중으로 소론계열의 합리적인 재상이었다. 나라에 양곡이 없으니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고 최석정이 주청사로 가서 청나라 강희제에게 구휼미 5만석을 얻어왔다. 명분과 의리에 매몰된 노론선비들은 굶어죽을지언정 호미(胡米,오랑캐쌀)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 해는 병자호란의 삼전도 굴욕이 있은 지 한 갑자 되는 해였고, 강희제는 인조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시킨 청 태종(홍타이지)의 손자였다. 정철의 현손으로 훗날 영의정에 오른 정호는 무엇보다 춘추대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맹비난했고 대간은 최석정을 파직시켰지만 나라는 기근에서 점차 벗어나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사진설명: 최장수 정승 황희를 모신 상주 모동의 옥동서원, 대원군 서원철폐에도 살아남음, 상주시청 제공)

증직(추증) 영의정
대학자이거나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에 대해 사후에 영의정으로 증직(贈職)했는데 증직일지라도 영의정은 무척 귀하다. 학문의 나라 조선왕조에서 학자로서 최고의 영광은 문묘배향현인으로 추앙받는 것인데 이를 동국18현이라 부른다. 신라시대 설총과 최치원, 고려시대 안향과 정몽주가 그러하며, 조선왕조의 인물 중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이, 조헌, 김집,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김인후가 문묘배향현인으로 영의정에 추증(追贈)됐다. 이밖에 대학자로 영의정에 추증된 인물은 사림의 종조 김종직을 비롯하여 조식, 정구, 장현광 등이 있으며, 척화파 김상헌, 충절의 선비 정온,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도 추증됐다. 무반으로는 임진란에 나라를 구한 이순신, 진주성 싸움에 순절한 김시민, 행주대첩의 권율이 드물게 증직 영의정이다.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은 구한말 갑오개혁을 단행한 김홍집내각의 김홍집이다. 풍전등화 속에 나라를 구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역대 수많은 영의정과 마찬가지로 사리사욕을 탐하지는 않았다. 이렇듯 조선의 영의정은 왕조 전 시기에 걸쳐 책임을 다한 인물이 많았으니 국운은 끈질기게 길었다.

조선의 대제학
대제학은 학문과 문장을 다루는 으뜸 인물이다. 글을 관리하는 홍문관과 예문관의 수장 벼슬이고 품계는 정2품으로 판서와 같다.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면 양관대제학이라 했고 이를 문형(文衡)이라 불렀다. 나라 글을 지었고 과거시험을 관장했다.

대제학을 뽑을 때 전임 대제학과 정승·판서가 의망에 든 인물을 권점(圈點,둥근점표시)하여 많이 나온 인물로 선임했는데 이를 문형회권이라 했다. 삼공육경이 다수결로 뽑을 만큼 문형은 나라 글의 주인이었다, 조선초에는 본인이 사임하지 않는 한 종신직이었다. 태종 때 변계량은 20년, 성종 때 서거정은 23년을 대제학으로 지냈다. 가장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오른 이는 선조 때 이덕형으로 31세였다.

조선 제일의 대제학은 서거정이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45년간 여섯 임금을 모시면서 15세기 문장을 평정하고 문병(文柄)을 장악했다. 왕명으로 수많은 저술을 주도해 나라 기틀을 세웠고 23번이나 과거시험을 관장했다.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오행총괄 등 불후의 사서를 주도적으로 편찬했고 역사성을 가지고 나라 성대함을 문장으로 나타냈다. 권근 변계량 서거정으로 이어지는 관각(館閣) 대제학의 중심인물이었다.

성리학과 대제학
조선후기 노론이 장기 집권하자 대제학도 자연히 노론 학맥에서 많이 나왔다. 조선중기 4대 문장가인 이정구, 신흠, 장유, 이식은 모두 대제학을 거쳤고 한 집안에서 대를 이어가며 대제학이 나왔다. 그중 이정구, 김장생, 이경여, 서성의 후손에서 많이 나와 연리광김이란 말이 생겼다. 효종 때 이식, 영조 때 이덕수, 김양택이 여러 번 지냈고 문예 부흥기 정조시대 대제학으로 홍양호, 이만수가 돋보인다,

하지만 성리학을 맹종하고 소중화에 매몰된 조선후기 학문적 경향에 대제학은 깊숙이 편승했다. 문형이 어떠한 자리냐고 수많은 선비들이 염원했지만 임란 이후 대제학이 편찬한 뛰어난 저작물을 찾기 어렵다. 동의보감, 목민심서, 성호사설, 동사강목, 열하일기, 연려실기술 등 훌륭한 저술은 모두 비주류 인물이 지었고 대제학은 국왕 행장이나 왕실 제문을 짓거나 사대 외교문서에 관여했다.

역사는 거울이다. 글의 나라 조선에서 학문숭상과 모화사상이라는 상반된 공과(功過)의 학문적 흐름에 공은 오늘의 기반이 됐고 과는 시대의 몽매(蒙昧)라고 우리에게 그렇게 나아갈 길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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