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조의 고전 이야기] 저희를 버리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AI 요약[편집자주 ]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시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 사회적 자본인 지식과 경험·노하우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 본 코너는 ‘종횡무진포럼·가디언·펄스㈜·한가향 ’이 공동후원 합니다 . -서재야회록, 신광환 그 사물들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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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시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 사회적 자본인 지식과 경험·노하우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 본 코너는 ‘종횡무진포럼·가디언·펄스㈜·한가향 ’이 공동후원 합니다 .
-서재야회록, 신광환
그 사물들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
한 달 전부터 아픈 듯했다. 냉장고가. 미약하면서도 고르지 못한 냉기를 겨우 내뿜는 것을 보고는 적잖이 걱정했다. 아픈 냉장고보다 다시 냉장고를 사야 하는 호주머니 사정을. 조금만 더 견뎌. 나름 응원도 했건만 냉장고는 결국 숨을 멈춰 버렸다.
죽음이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라면, 죽음은 생명체에게만 들이닥치는 필연은 아닐 것이다. 사물들 역시 언젠가는 죽음 안으로 들어선다. 죽을 자리를 찾는 코끼리처럼 조용히 떠나는 사물도 있겠지만, 어떤 사물들은 죽기 전 ‘에고, 나 죽는다.’ 같은 신호를 보낸다. 컴퓨터는 버벅거리며 아픈 기색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핸드폰은 제 근본을 망각하고 불통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들이 죽기 전 보내는 신호는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생명력을 느끼도록 한다.
사물들이 정말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면?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면?
이러한 상상을 하는 이들이 적진 않을 것이다. 조선 시대 선비 신광환 역시 그랬다. 그는 상상에 그치지 않고 소설로 쓰기까지 했는데, 그 소설이 <서재야회록>이다.
어느 날 밤 그 서재에서는
한문 단편 소설 <서재야회록>은 ‘서재에서 밤 모임을 한 것에 대한 기록’이다. 제목에서 이미 공간과 시간은 나와 있다. 하지만 누가, 왜는 빠져 있다. 그러게, 누가 무슨 이유로 늦은 밤 서재에 모였던 것일까. 소설은 서재의 주인인 한 선비를 소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 사부(사대부)가 있었다. 성명은 생략하고 적지 않는다. 옛것을 좋아하고 실의에 차 있었으며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했다.
-서재야회록
작가는 선비의 이름조차 짓지 않는다. 오로지 그가 얼마나 쓸쓸한지 보여줄 뿐이다.
일찍이 달산촌에 별채를 지은 적이 있는데, 문을 닫아걸고 왕래를 끊고는 오직 책만을 즐겼다. 이웃집도 그 얼굴을 보지 못한 지가 몇 년이나 되었다.
-서재야회록
한가위를 이틀 앞둔 때다. 고요한 뜰을 거닐며 크고 밝은 달을 보던 선비는 서재에서 두런두런 말하는 소리가 들리자 호기심과 두려움을 느낀다. 원래라면 아무도 없어야 하는 공간에 도대체 누가 들어간 것인가. 그는 조심스럽게 창 안을 들여다본다. 마침 방 안으로 달빛이 들어 그 안이 훤히 보인다.
네 사람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은 까만 비단옷에 검은 관을 썼는데, 중후하고 꾸밈이 적었으며 가장 연장자였다. 또 한 사람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모자를 벗어 맨 상투가 위로 도드라져 있었으며 기품이 심히 날카로웠다. 또 한 사람은 흰옷에 관건을 썼으며 용모가 백옥같이 희고 깨끗한 눈 같았다. 또 한 사람은 검은 옷 검은 모자에 얼굴은 푸르게 칠한 것 같았으며 극히 못생기고 작달막했다.
-서재야회록
비단옷에 검은 관을 쓴 이는 벼루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이는 붓이다. 흰옷에 관건을 쓴 이는 종이고, 검은 옷 검은 모자를 쓴 이는 먹이다. 이들은 흔히 문방사우로 불린다. 선비들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늘 옆에 두는 문구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달산촌의 이 선비는 자기 서재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을 보고 바로 문방사우라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사람의 말을 나누고, 사람처럼 시를 짓는데 이들이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선비는 조심스럽게 네 사람의 대화에 귀 기울인다. 장난기 섞인 비난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보니 네 사람 모두 막역한 사이인 듯하다. 각자 수준 높은 시를 짓거나 감상하는 것을 보니 문장에도 능해 보인다. 무언가 일반적이지 않다. 상황은 특이하고, 달빛을 머금은 네 사람의 행태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아, 저들은 사람이 아니구나. 물괴(괴이한 물체)구나.’
선비는 그제야 헛기침을 뱉어내며 자신이 그곳에 있음을 알린다. 도둑이 아니니 무서울 것이 없다. 물괴면 어떤가. 지켜본 바로 저들은 내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 기척에 놀란 문방사우는 순식간에 몸을 감추고 말았다. 선비는 즉시 물러나 축문을 지어 읊었다.
그대들은 나를 곤궁하게 한 자들이 아니오. 내 이미 그대들 심정을 아는데, 구태여 그대들 모습을 감출 것인가. 지금 나는 그대들을 내쫓으려는 게 아니라 그대들을 윗자리로 모시려는 것이오. 이 세상과 저 세상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지성이면 필시 통할 수 있을 것이오. 네 분은 끝내 나를 버릴 수 있겠소?
-서재야회록
선비의 축문을 들은 네 사람은 선비 앞에 모습을 보였다. 이후, 그들은 서로를 소개하고, 즐거이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새벽달이 서산에 떨어지는 기미가 보일 즈음이다. 선비는 네 사람에게 시를 청한다.
벼루 : 웃지들 마라, 돌창자가 지금 모두 닳은 것을.
먹 : 검은 가루 다 찧는 건 흰 토끼의 근심,
창힐 글자 배우던 때 이 몸 태어났네.
(창힐 : 한자 창조자로 일컬어지는 전설상 인물)
이마 다 닳도록 세상 구제하는 일이라도 양주에게 한 발도 양보하지 않으리.
붓 : 풍요롭던 옛일은 아무도 관심 없으니,
술 마시며 글재주 다투는 일 이제 다 틀린 일이로세.
종이 : 누덕누덕 만신창이나마 나로부터 전해졌네.
석거각의 많은 책 짐바리로 거둬들여,
환한 달빛 영롱한데 섬계 뱃놀이 저 버렸네.
-서재야회록
이에 선비는 화답한다.
“백 년 교우를 누구와 맺을꼬 하다, 우연히 산중에서 네 노인을 알았네. 뒷날 다시 알 수 있게 오늘 밤 이 이야기를 서재 책장 속에 보배로 남겨 두리라.”
네 사람이 절을 하고 말하기를,
“저희를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버리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드디어 떠나겠다고 말하고서는 어름어름 사라져 버렸다.
-서재 야회록
그대들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네 사람이 사라진 후, 선비는 방안에 누워 방금 일어난 일을 곰곰이 생각한다. 어쩐지 그 사람들의 정체를 알 것도 같다.
선비는 방안의 붓, 벼루, 종이, 먹을 찾아 살펴보았다. 옛날에 보관해 두었던 벼루는 바람벽 흙덩이를 맞고 깨어져 있고, 붓 한 자루는 무늬 있는 대나무로 대롱을 만들었는데 뚜껑이 없었으며 너무 닳아 글씨를 쓸 수 없었고, 먹 한 개는 다 닳아 남은 것이 한 치도 안 되었다. 종이는 며칠 전에 시중드는 아이가,
“이곳에 투박한 종이가 있는데 장 단지를 덮겠습니다.”
하여, 선비가 그렇게 하라고 했었는데, 아이를 불러 그 종이를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니 바로 깨끗하고 두꺼운 종이었다. 이에 환히 모든 것을 깨달았다. 즉시 종이로 세 물건을 싸서 담장 밑에 묻어 두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서재야회록
뒤이어 그는 제문을 지었는데, 그 일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형체는 없는 데서 생겼다가 또다시 없어지고, 시간도 없는 데서 생겼다가 또다시 없어지네. 백 년 벗을 굳게 맺어 세상일을 토론했네. 살아서는 막역한 벗, 죽어서도 같은 무덤. 그래도 사람인데 사물만도 못할 것인가. 낭낭한 석별 인사 감히 부탁을 잊으리오. 내 무엇을 상심하리. 그대들이 떠난다 해도 그대들 혼 남았으면 이 글에 감응하리.
-서재야회록
제문을 들은 네 사람은 다시 나타났을까?
이날 밤 꿈에 네 사람이 와서 사례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지금부터 사십 년을 더 살 수 있을 겁니다. 이것으로 보답합니다.”
하였다. 그 뒤 다시는 이런 변괴가 없었다고 한다.
-서재야회록
기재기이, 기재가 기이한 일을 기록하다.
신광한(1484년-1555년)은 신숙주의 손자로 문장에 능한 인물이었다. 1507년 중종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로 대사성,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 수많은 관직을 거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이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기묘사화(1519년)에서 극형을 당한 조광조의 일파로 탄핵당해 여주로 추방당했는데, 이후로 18년이나 칩거하기도 했다.
신광한은 1553년에 전기소설집 <기재기이(企齋奇異)>를 발간한다. 기재는 신광한의 호이며, 기재는 기이한 일을 기록한다는 뜻이다. 직역하자면 <기재기이>는 ‘신광한이 기이한 일을 기록한 책’이지만, 실제로는 신광한의 한문 단편 소설 네 편이 실려 있는 소설집이다. 이 중 하나가 <서재야회록>이다. 다른 세 편으론 <안빙몽유록>, <최생우진기>, <하생기우록>이 있다.
<안빙몽유록>은 안빙이 꿈속에서 꽃의 나라를 여행하는 이야기이고, <최생우진기>는 최생이 수부(물을 맡아 다스리는 궁전)에 초대받아 신선들과 만나는 이야기이고, <하생기우전>은 하생이 죽은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그 여자를 살려 결혼해서 잘 살았다는 이야기다. 기재기이에 실린 소설 전부 기이하면서도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전기소설(傳奇小說)의 범주에 든다. 15세기 전기 소설집으로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있다면, 16세기 전기 소설집으로 <기재기이>가 있다.
<서재야회록>은 신광한이 41세였을 적 경험을 바탕으로 썼을 것으로 추측한다. 당시 그는 여주 원형리에 서재를 짓고 여러 해 동안 서책만 읽으며 지냈다. 이때 그는 자신만의 서재에서 늘 함께했던 문방사우가 수명을 다해 더는 쓸 수 없게 된 경험을 했을 수도 있다.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낸 이 오래된 친구들을 어떻게 그냥 보낼 수 있나. 그의 경험과 애틋한 마음에서 나온 상상이 문방사우를 소설에서나마 살아 있는 존재로 태어나게 했을 것이다.
*김미조 칼럼니스트
김미조는 소설을 쓰면서 인문학책을 기획, 집필하고 있다. 장편소설 『천국의 우편 배달부』로 데뷔했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집 『니는 혼자가 아이다』, 『빌어먹을 놈은 아니지만』 『피노키오가 묻는 말』, 수필집 『엄마의 비밀정원』, 인문서 『국제 분쟁, 무엇이 문제일까.』, 『10대와 통하는 자본주의 이야기』 등이 있다. 또, 포천 문화재단이 주관한 뮤지컬 『화적연-용신과 도깨비 공주의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김미조는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가 가능한 작가로, 앞으로도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김미조 칼럼니스트
김미조는 소설을 쓰면서 인문학책을 기획, 집필하고 있다. 장편소설 『천국의 우편 배달부』로 데뷔했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집 『니는 혼자가 아이다』, 『빌어먹을 놈은 아니지만』 『피노키오가 묻는 말』, 수필집 『엄마의 비밀정원』, 인문서 『국제 분쟁, 무엇이 문제일까.』, 『10대와 통하는 자본주의 이야기』 등이 있다. 또, 포천 문화재단이 주관한 뮤지컬 『화적연-용신과 도깨비 공주의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김미조는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가 가능한 작가로, 앞으로도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기사 정정 신청뉴스제보 jebo@newsr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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