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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조의 고전 이야기] 그대를 사랑하여 불이 되었지요

AI 요약[편집자주 ]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시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사회적 자본인 지식과 경험·노하우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본 코너는 ‘종횡무진포럼·가디언·펄스㈜·한가향 ’이 공동후원 합니다. - 지귀 설화. 작자미상 불이다, 불이 났다! 신라 제27대...

[김미조의 고전 이야기] 그대를 사랑하여 불이 되었지요
[편집자주 ]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시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사회적 자본인 지식과 경험·노하우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본 코너는 ‘종횡무진포럼·가디언·펄스㈜·한가향 ’이 공동후원 합니다. - 지귀 설화. 작자미상 불이다, 불이 났다! 신라 제27대 왕인 선덕 여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때의 일이다. 지귀라는 한 남자의 마음에 불이 일어나버렸다. 불은 그의 가슴을 태우고, 머리와 팔다리로 옮겨져 마치 기름이 묻은 솜뭉치처럼 활활 타올랐다. 새빨간 불덩이가 된 남자는 그 상태로 날뛰었다. 그 탓에 온 거리의 집들이 불에 휩쓸렸다. 사람들은 두려웠다. 저 불귀신이 우리 집도 태우면 어쩌나. 저 불귀신이 나와 내 가족을 태우면 어쩌나. 그러한 때, 선덕 여왕은 불귀신을 쫓는 주문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주문은 이러하다. 지귀는 마음에 불이 나 몸이 불로 변하였다. 바다에 멀리 쫓아서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지귀 설화 주문의 효과는 커 대문에 붙인 집들은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귀는 어쩌다 불귀신이 되었을까. 그의 마음속에 똬리를 튼 감정이 무엇이고, 또 그 감정이 얼마나 강하면 불로 타올랐을까. 그 사연은 <지귀설화>에 담겨 있다. 그 여자가 내 마음을 빼앗아버렸네. ‘선덕 여왕님이시다. 여왕께서 지나가신다!’ 지귀는 한 날 서라벌에 간다. 그날 그가 서라벌에 간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냥 놀러 간 것인지, 누군가의 심부름으로 간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여왕의 행차가 있다는 것을 알고 구경 간 것인지. 아무튼, 그는 선덕 여왕의 행렬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을 뚫고 길의 앞줄까지 나아간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왕이 탄 마차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왕을 볼 수 있다니…….’ 여왕의 행렬이 바로 코앞까지 와 있다. 고개를 쑥 내민다. 조금 전보다 더 세차게 뛰는 심장박동에 숨이 차다. 왔다. 여왕이 탄 마차가 바로 앞에 있다. 그런데 여왕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여왕이 길 반대편의 사람들을 보고 있어서다. 이쪽도 봐주세요. 고개를 돌려주세요. 그때다. 여왕이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순간 뜨끈하면서도 간질거리는 씨앗 하나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박혀 버린 듯하다. 세계가 변한다. 그곳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 길엔 그와 여왕만이 있다. 아름답다. 지귀의 머릿속에 이 문장 하나가 재빨리 지나간다. 금관이나 비단옷 때문이 아니다. 그런 걸 쓰거나 입지 않았어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반지르르한 도자기 같은 낯빛, 흑요석을 박은 듯한 눈동자, 미소를 살짝 머금은 우아한 입가, 마치 하늘의 선녀가 이 땅에 잠깐 발을 디딘 듯하다. 그 짧은 순간, 지귀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감정을 느껴버린다. 아름다운 여왕이여, 나의 사랑하는 선덕 여왕이여. -지귀 설화 여왕님, 그대를 사랑해 미친 남자가 있지요. 지귀는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선덕 여왕을 부르다가 미쳐 버리고 말았다. -지귀 설화 사랑이 이처럼 둔탁하고 무거운 것일 줄이야.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정신을 놓는다. 일상이 멀어진다. 지귀의 바람은 오로지 하나다. 다시 여왕을 보는 것. 그러던 어느 날이다. 여왕의 행차 소식을 다시 접하게 된다. 그는 여왕을 보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막무가내로 선덕 쪽으로 달려간다. 이를 목격한 주변 사람들이 지귀를 막아선다. 왜, 어째서. 욕망에 분별력까지 내어놓은 지귀는 이해할 수 없다. 제 앞을 막는 이들을 거세게 밀친다. 그 과정에서 떠들썩해진다. 그 소리를 들은 선덕여왕이 묻는다. “무슨 일이냐?” “미친 사람이 여왕님 앞으로 뛰어나오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붙들려서 그럽니다.” “왜 나한테 온다는 데 붙잡았느냐?” “아뢰옵기 황송합니다만, 저 사람은 지귀라고 하는 미친 사람인데 여왕님을 사모하고 있다고 합니다.” 관리는 큰 죄나 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고마운 일이구나” 여왕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하고는, 지귀에게 자기를 따라오도록 관리에게 말한 다음 절을 향하여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지귀 설화. 지귀는 덩실덩실 춤까지 추며 선덕 여왕의 행렬을 뒤따랐다. 선덕이 불공을 드리기 위해 법당 안으로 들어서자 지귀는 절 탑 아래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선덕을 방해해 미움을 받고 싶지 않다. 그저 기다리는 것,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제나 나올까, 저제나 나올까. 법당 쪽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눈이 뻐근하다. 간절함과 초조함은 괴물처럼 사람의 에너지를 먹어치운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눈을 감으면 안 되는데……. 지귀는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여왕은 불공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탑 아래에 잠들어 있는 지귀를 보았다. 여왕은 그가 가엾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팔목에 감았던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 위에 놓은 다음 발길을 옮겼다. -지귀 설화 지귀가 눈을 뜬 건 여왕의 행렬이 사라진 후다. 적막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이 서 있던 법당 앞은 거짓말처럼 깨끗이 비어 있다. 덜컥 겁이 난다. 진짜, 진짜 가버렸다고? 믿기지 않는다. 그 몇 분을 참지 못해 잠들고 만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그의 시선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잡힌다. 여왕의 금팔찌다.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가슴에 꼭 껴안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자 그 기쁨은 다시 불씨가 되어 가슴속에 활활 타올랐다. 그러다가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가 싶더니 이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가슴 속에 있는 불길은 몸 밖으로 터져 나와 지귀를 어느새 새빨간 불덩어리로 만들고 말았다. -지귀 설화 그렇게 지귀는 불귀신이 되어버린다. 마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만만치 않은 힘. 지귀는 있는 힘을 다하여 탑을 잡고 일어서는데 불길은 탑으로 옮겨져서 이내 탑도 불기둥에 휩싸였다. 지귀는 꺼져 가는 숨을 내쉬며 멀리 사라지고 있는 여왕을 따라가려고 허우적허우적 걸어가는데, 지귀 몸에 있던 불기운은 거리까지 퍼져 온 거리가 불바다를 이루었다. -지귀 설화 여왕을 따라가려고 허우적허우적 걸어가는 남자의 몰골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길목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덩어리 하나가 재앙처럼 굴러갈 뿐이다. 반면, 불덩어리는 본다. 비명을 지르며 저를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 얼굴에 가득 깃든 공포심을.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내가 한 일이라곤 여왕을 사랑하고, 여왕의 선물에 기뻐한 것뿐인데.’ 어쩌면 지귀는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사랑은 죄가 아니잖아. 세상 사람이 흔히 말하듯. 사랑하는 마음은 죄가 아닐 것이다. 어떠한 마음도 죄가 될 수는 없다. 애당초 마음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며 그것 자체로는 별 힘이 없다. 그런데 사람이 행하는 일에 마음이 관여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나. 나를 무언가가 되게 하거나 무언가로 만드는 것은 결국 마음이다. 지귀 설화가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지귀 설화는 신라 말기 최치원이 편찬한 <수이전>에 실려 있던 이야기다. 이후 박인량이 보충했고, 김척명이 개작했는데,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수이전에 실렸던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는 건,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대동운부군옥 등 여러 서적에 흩어져 전해지고 있어서다. 지귀 설화는 대동운부군옥(1836년 편찬, 권문해)에 ‘심화요탑’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심화요탑(心花繞塔)을 직역하면, ‘마음의 불이 탑을 감싸다.’다. 마음이 심지라면 불을 붙인 건 사랑이 된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은 아니다. 제아무리 절절해도 사랑은 마음에 불을 붙일 수 없다. 지귀 설화가 소설이라면 작가의 상상력으로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지귀 설화는 설화다. 당시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흔히 거론되는 이유로 ‘빈번하게 발생한 화재’가 있다. 선덕 여왕 시대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자주 발생했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예측한다. 원인을 모르니 합당한 해결책을 찾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내세운 존재가 ‘불귀신’이다. 불귀신이 불을 낸 것이라면, 주술로 물리치면 된다. 주술을 믿었던 시대에 주술로 해결할 수 있는 원인을 찾아낸 건 당대 사람들이 찾아낸 나름의 위기 관리법이었을 것이다. 설혹 별 효과가 없다 하더라도.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야기 속 지귀는 필연적으로 불귀신이 되어야 했던 존재다. 그의 사랑이 불을 만든 것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불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먼 바다로 쫓겨난 지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지금도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도 있다. 왜? 도대체, 왜? 여왕을 사랑했을 뿐인데. *김미조 칼럼니스트 김미조는 소설을 쓰면서 인문학책을 기획, 집필하고 있다. 장편소설 『천국의 우편 배달부』로 데뷔했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집 『니는 혼자가 아이다』, 『빌어먹을 놈은 아니지만』 『피노키오가 묻는 말』, 수필집 『엄마의 비밀정원』, 인문서 『국제 분쟁, 무엇이 문제일까.』, 『10대와 통하는 자본주의 이야기』 등이 있다. 또, 포천 문화재단이 주관한 뮤지컬 『화적연-용신과 도깨비 공주의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김미조는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가 가능한 작가로, 앞으로도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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