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조의 고전 이야기] 돼지가 폭포를 먹어버렸습니다
AI 요약[편집자주 ]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시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사회적 자본인 지식과 경험·노하우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본 코너는 ‘종횡무진포럼·가디언·펄스㈜·한가향 ’이 공동후원 합니다. 돼지가 삼킨 폭포(猪喫瀑布, 저끽폭포), 서거정 우스갯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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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시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사회적 자본인 지식과 경험·노하우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본 코너는 ‘종횡무진포럼·가디언·펄스㈜·한가향 ’이 공동후원 합니다.
돼지가 삼킨 폭포(猪喫瀑布, 저끽폭포), 서거정
우스갯소리를 즐긴 노인, 서거정
“또, 무슨 우스갯소리를 알고 있나? 말해보게.”
노인의 얼굴 가득 웃음기가 번져 있다. 젊은 손도 덩달아 마음에 즐거움이 찬다.
‘보자, 내가 오늘 이야기를 몇 개나 했더라.’
머릿속으로 대충 세어보니 이미 여남은 개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듯하다.
노인의 집에 들어설 때만 해도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만 말하는 중이다. 노인 덕분이다. 이야기 하나를 끝내면, 어김없이 ‘또, 들려주게.’라는 말이 돌아온다. 다른 손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곤 제 말에 귀를 기울이니 신이 날 수밖에 없다. 없던 이야기도 지어낼 판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가 계속 떠오른다. 다만 지금 떠올린 이야기는 해도 되는지 잠시 망설인다. 슬쩍 노인을 본다. 총기가 깃든 눈매가 날카롭다. 신선처럼 길게 늘어뜨린 수염엔 기품이 서려 있다. 얼굴 여기저기 거뭇하니 핀 저승 꽃조차 그의 생기를 빼앗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손은 새삼 깨닫는다.
‘아, 그래,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서거정이었지.’
우스갯소리를 아무리 즐겨 듣는다 해도 그는 서거정이다. 스물셋에 문과급제하고 장장 45년이나 관직 생활을 해 온 사람이다. 그동안 그가 모신 임금만 여섯이다. 그는 조선 법전인 <경국대전>, 조선의 지리와 풍속 등을 기록한 <동국여지승람>, 민간의 의학 처방에 사용되는 약재를 기록한 <향약집성방>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 신라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작품 4,302편이 수록된 시문집 <동문선>의 최고 책임자이기도 했다. 법, 역사, 의학, 지리, 문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꿰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뿐인가. 그 자신 또한 시문에 능해 주옥같은 시만 수천 편 이상이다.
무엇보다 서거정은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동시에 맡은 최초의 인물’로 유명하다. 예문관은 조정에서 글을 전담하는 곳이고, 홍문관은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하는 곳이다. 두 곳 다 위세가 대단하여 각 부서의 책임자인 대제학을 한 사람이 맡는 경우는 없었다. 서거정이 최초였다. 어지간히 문장이 뛰어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그의 술자리에선 한시를 주고받거나 진지하게 학문을 논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서거정이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다.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하니 놀라울 정도다.
‘이런 분이라면, 어떤 이야기든 다 즐겨 들으실 것 같구나. 그 정도의 품은 차고도 넘치겠구나.’
젊은 손은 말할까 말까 망설였던 이야기를 꺼내기로 한다.
“혹시, 돼지가 폭포를 삼킨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돼지가 삼킨 폭포(猪喫瀑布, 저끽폭포)
한 조관(朝官, 조정의 신하)이 일찍이 진양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그는 가렴주구가 심한 자라 산골의 과일과 채소까지도 그대로 남겨 두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절간의 중들도 그 폐해를 입었다.
하루는 중 하나가 수령을 찾아가 뵈었다. 수령이 말했다.
“너희 절의 폭포가 좋다더구나.”
중은 폭포가 무슨 물건인지 알지 못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도 세금으로 가져가 버릴까 두려워하며 대답했다.
“우리 절의 폭포는 이해 여름에 돼지가 다 먹어버렸습니다.”
-돼지가 삼킨 폭포.
젊은 손은 말하는 중간중간 서거정의 표정을 살핀다. 저는 일개 선비로 아직 관직을 맡은 적이 없다. 반면, 서거정은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관리를 비판한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도 하고, 걱정도 된다. 그런데 ‘돼지가 폭포를 먹어버렸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거정의 웃음이 들린다.
“오호! 참담한 현실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낸 그 발상이 기발하오. 고맙소, 고마워. 이런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또,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시오.”
그제야 손은 적잖이 안심한다.
“혹시 한송정(寒松亭)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까?”
“한송정이라면, 강원도 강릉에 있는 그 소문난 정자 말이요? 울창한 소나무에 눈이 즐겁고 탁 트인 동해에 마음이 즐거운 곳이라 들은 바 있습니다만.”
“네. 그 한송정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곳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많은 관리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러 찾곤 했지요.”
손은 한결 여유롭게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다.
저 한송정은 호랑이가 물어 가 버려야 하는데.
강원도 한송정의 산수가 관동 지방에서는 으뜸이었다. 풍류를 즐기는 이들이 끊이지 않고 말과 수레가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이들을 접대해야 하는 고을 주민들은 적잖이 비용이 들자 항상 푸념했다.
“저 한송정은 어느 때나 호랑이가 물어 갈까?”
-돼지가 삼킨 폭포
“그렇지, 그렇지. 양반들이나 풍류를 즐기지. 농사를 지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느라 바쁜 백성들에겐 한송정이 그저 골칫거리일 뿐이겠지. 탁월하도다. 어찌 이리 백성들의 마음을 해학적으로 잘 풀어냈을까.”
서거정은 감탄하고선 그 자리에서 두 구의 시를 짓는다.
폭포는 옛날에 돼지가 먹어버렸네만, (瀑布當年猪喫盡, 폭포당년저끽진)
한송정은 어느 때에 호랑이가 물어 가려나. (寒松何日虎將歸, 한송하일호장기)
-돼지가 삼킨 폭포
이 시는 ‘저끽폭포(돼지가 삼킨 폭포)’와 함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 실리게 된다.
조선 시대의 유머집,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성종 13년(1482년), 서거정은 시중에서 떠도는 우스갯소리를 생각나는 대로 기록해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을 편찬한다. 태평한화골계전은 ‘태평한 시대에 한가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뜻으로, 오늘날로 따지면, 일종의 유머집이다.
일찍이 일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있을 때 글을 쓰는 것으로 놀이로 삼았다. 이에 일찍이 친구들과 우스갯소리 했던 바를 골계전(滑稽傳)이라 불렀다.
-태평한화골계전 서문, 서거정
‘골계(滑稽)’는 ‘일부러 남을 웃기려는 행동이나 말’을 뜻한다. 이를 잘 살린 표현을 흔히 ‘골계미(滑稽美)’가 있다고 하는데, 골계미는 ‘익살스러운 풍자’가 핵심이다. 골계미를 잘 보여 주는 장르로 사설 시조나 탈춤을 꼽지만, 골계미는 고전 문학 전반에 걸쳐 곧잘 그 모습을 드러낸다. 태평한화골계전은 제목에서부터 아예 대놓고 ‘나는 풍자를 통한 웃음을 줄 것이요.’라고 주장하는 만큼 그 안에 든 이야기들 대부분이 골계미를 지닌다.
어떤 시대든 유머는 존재했고, 그 유머 속엔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이나 생각이 들어 있다. 그렇기에 태평한화골계전은 ‘국문학사상 현전하는 최초의 대규모 순수 설화 자료집’이라는 문학사적 의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원본은 남아 있지 않아 완전한 모습을 알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태평한화골계전과 관련된 기록들이 다수 남아 있다는 것이다.
강희맹의 <골계전 서>에 따르면 이 책은 본래 4권 2책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고 한다. 또, 서거정의 <자서>, 양성지의 <동국골계전서>, <조선왕조실록> 등 다수의 문헌 자료를 통해 원래는 약 270편이 넘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태평한화골계전의 이본 5종과 해동잡록 등에 수록된 것들로 그 수는 약 134편에 달한다. 이 중 두 편 더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온통 아내를 두려워한다. (도도외처, 滔滔畏妻)
어떤 대장군이 아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한날, 들판에 청기와 홍기를 세우고는 부하 장병에게 명하였다.
“아내를 두려워하는 자는 붉은 깃발 아래에 모이고, 아내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푸른 깃발 아래에 모여라.”
그러자 거의 모든 군사가 붉은 깃발 아래에 모여 섰는데, 단 한 사람만이 푸른 깃발 아래에 서 있었다. 대장군은 그를 장하게 여겨 말했다.
“그대는 진실로 대장부로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내를 두려워한다. 나는 백만 명을 거느리고 적군과 죽기로 싸울 적, 화살과 돌멩이가 비 오듯 해도 담력과 용기가 백배나 더해졌다. 일찍이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안방에 들어가 이부자리 위에 이르러서는 사랑을 이기지 못하여 부인에게 제압당한다. 그런데 그대는 어떻게 아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는가?”
푸른 깃발에 선 장병이 말하였다.
“아내는 제게 항상 ‘남자들이란 세 사람만 모이면 반드시 여자 이야기를 하니 세 사람 이상 모인 곳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붉은 깃발 아래엔 사람들이 매우 많이 모여 있길래 가지 않은 것입니다.”
대장군이 기뻐하며 말했다.
“나만 아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구나!”
-태평한화골계전.
닭을 타고 가겠네. (차계기환, 借鷄騎還)
김 선생은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사람이다. 한날 그가 친구의 집에 갔더니, 친구는 술상을 차려준다. 그런데 가만 보니 채소 안주뿐이다. 친구는 먼저 사과하곤 이렇게 말한다.
“집이 가난하고, 시장이 멀어 내놓을 것이 이뿐이라네.”
이 말을 듣는 김 선생의 눈엔 뜰 안에서 닭 몇 마리가 먹이를 쪼아먹고 있는 게 보인다.
“대장부는 천금을 아끼지 않는 법이지. 내가 타고 온 말을 잡아 술안주로 하지.”
김 선생의 말에 놀란 친구가 묻는다.
“타고 온 말을 잡으면 무엇을 타고 집에 돌아가려는가?”
김 선생이 말한다.
“닭을 빌려 타고 돌아가면 되지.”
친구는 크게 웃고는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태평한화골계전.
*김미조 칼럼니스트
김미조는 소설을 쓰면서 인문학책을 기획, 집필하고 있다. 장편소설 『천국의 우편 배달부』로 데뷔했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집 『니는 혼자가 아이다』, 『빌어먹을 놈은 아니지만』 『피노키오가 묻는 말』, 수필집 『엄마의 비밀정원』, 인문서 『국제 분쟁, 무엇이 문제일까.』, 『10대와 통하는 자본주의 이야기』 등이 있다. 또, 포천 문화재단이 주관한 뮤지컬 『화적연-용신과 도깨비 공주의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김미조는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가 가능한 작가로, 앞으로도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김미조 칼럼니스트
김미조는 소설을 쓰면서 인문학책을 기획, 집필하고 있다. 장편소설 『천국의 우편 배달부』로 데뷔했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집 『니는 혼자가 아이다』, 『빌어먹을 놈은 아니지만』 『피노키오가 묻는 말』, 수필집 『엄마의 비밀정원』, 인문서 『국제 분쟁, 무엇이 문제일까.』, 『10대와 통하는 자본주의 이야기』 등이 있다. 또, 포천 문화재단이 주관한 뮤지컬 『화적연-용신과 도깨비 공주의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김미조는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가 가능한 작가로, 앞으로도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기사 정정 신청뉴스제보 jebo@newsr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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