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역사기행] 역사의 기록자, 사관(史官)
AI 요약조선은 기록의 나라이다. 14세기 전근대기에 나라를 세워 왕조가 멸망하는 20세기까지 오백년 동안 나라의 정사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인류 역사에서 오백년을 왕업으로 유지한 왕조는 무척 드물거니와 왕조 일대기를 온전하게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한 왕조는 거의 없다. 기록은 왕조를 이끄는 동력이 됐고 실록은 역사의 보물로 인류의 문화유산이 됐다. 국왕은 ...
![[이도국의 역사기행] 역사의 기록자, 사관(史官)](https://img.newsro.kr/wp-content/uploads/2024/02/이도국-3타이틀771-x-434-픽셀.jpg)
조선은 기록의 나라이다. 14세기 전근대기에 나라를 세워 왕조가 멸망하는 20세기까지 오백년 동안 나라의 정사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인류 역사에서 오백년을 왕업으로 유지한 왕조는 무척 드물거니와 왕조 일대기를 온전하게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한 왕조는 거의 없다. 기록은 왕조를 이끄는 동력이 됐고 실록은 역사의 보물로 인류의 문화유산이 됐다.
국왕은 사초와 실록을 볼 수 없었고 사관은 차라리 귀양 갈지언정 사필(史筆)을 꺾지 않았다. 만인지상인 국왕이 오로지 두려워한 것은 하늘과 사관이라 했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조선 왕조는 나라의 기록과 보존에 온 힘을 쏟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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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특별한 피해가 없는 사고본으로 국역화 작업에 동원됐고 지금은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 보관돼 있다.[/caption]
기록의 엄정은 태조에서 시작되고
조선이 개국한 지 3년이 지난 1395년,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과 정충이 고려사 37권을 편찬하여 바치자 이를 흡족해 하며 교서를 내렸다. “임금이란 하늘의 덕을 대신하여 나라를 가지고 역사를 책으로 만드는 것은 일대의 전장(典章,제도와 문물)만을 갖추자는 것이 아니라 후세에 권장하고 경계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대(前代)의 흥망성쇠는 반드시 뒷사람에 의해 사서로 만들어지고 후왕들의 권계(勸戒)가 된다. 다스리게 되면 흥하고, 어지럽게 되면 망하는 것이 이치이니 어찌 전대의 역사를 보지 않으랴. 그러니 옛 일을 거울삼아 앞에 가던 수레를 당연히 경계할지니라.”
태조 이성계는 무인이지만 지혜로운 군주였다. 혼돈의 14세기에 나라를 다시 세워 당대의 지성 집단에게 새 왕조의 설계를 맡겼고 전대의 멸망사를 들여다보고 경계하며 오백년 왕업의 기초를 다졌다. 이 고려사 37권이 세종의 명에 의해 정인지, 김종서가 139권으로 개수하여 오늘날 전해온다.
아울러 태조는 춘추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이 국정을 논할 때 사관이 입시토록 했고, 겸임사관은 각기 보고들은 것으로 사초를 만들고 지방 관아의 중요한 일들을 철마다 보고받아 기록으로 남겼다. 정종 때부터는 국왕의 공부인 경연에 사관이 참석하여 학습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했으니 조선의 왕들은 학업을 등한시 할 수 없었다.
정종의 경연관 조박은 “국왕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과 사필이요, 하늘은 푸르고 높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리(天理)를 말하는 것이요, 사관은 국왕의 착하고 악한 것을 그대로 기록하여 만세(萬世)에 남기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이렇듯 기록의 엄정함은 개국과 더불어 시작됐다.
직급이 낮은 사관
사관의 직급은 매우 낮았다. 7품 이하 참하관으로 전임사관과 겸임사관으로 나누어진다. 전임사관은 왕명을 관장하는 예문관의 여덟 관리로 7품 봉교 2명, 8품 대교 2명, 9품 검열 4명인데 이를 ‘8한림’이라 불렀다. 겸임사관은 다른 업무를 하면서 실록을 관장하는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하고 있어 ‘겸춘추’라 했다. 대표적인 겸춘추는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의 주서(7품)와 가주서이다.
사관은 낮은 직급임에 불구하고 보임이 무척 까다로웠다. 반드시 문과 급제자이어야 하며 문벌있는 가문 출신으로 사조(四祖)에 흠이 없어야 하고 초서로 빨리 써야 하므로 문필이 뛰어나야 했다. 사관을 거쳐야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사필의 전범, 춘추필법
사필은 춘추필법을 전범으로 삼았다. 춘추(春秋)는 공자가 저술한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의 242년 역사서인데 어떻게 쓰여 졌기에 그 필법이 오천년 동양 역사서 저술에 기준이 됐는가?
공자는 고국의 역사서인 춘추를 저술하면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전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을 밝혀 그것으로 천하의 질서를 바로 세우려고 했다. 명분에 따라 용어들을 엄격히 구별했고 스스로 판단하여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였기 때문에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 수 없었다. 공자는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요,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춘추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춘추필법은 명분에 따라 준엄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나 감정에 의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기술하는 직필(直筆)을 말하며 옳고 그름을 분명히 따졌다. 그래서 춘추는 유가오경의 하나로 불후의 고전이 됐고 필법은 사서 저술의 전범이 됐다. 오늘날 춘추관으로 그 뜻이 남아있다.
초고 기록 사초
국초부터 왕이 한 말은 좌사(左史)가, 왕이 한 행동은 우사(右史)가 기록한다고 했다. 사관이 입시하지 않으면 대신이라도 국왕을 친견할 수 없었다. 사관이 없는 국왕 친견을 독대(獨對)라 하며 역사상 세 번 독대, 유영경의 정미독대(1607), 송시열의 기해독대(1659), 이이명의 정유독대(1717)가 오랫동안 논란거리가 됐다.
사초(史草)는 초고이므로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만든 후 물에 씻어 종이로 재활용하니 남아있을 수 없는데 현종·숙종 때 승정원 가주서를 지낸 경북 칠곡의 이담명이 쓴 사초가 남아있다. 3년간 사초인데 분량이 161책이나 되며 현종·숙종의 60년 치세 기록인 헌종·숙종실록(96책)보다 훨씬 많다. 초서로 쓴 방대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들어간 내용이 극히 일부분이니 조선왕조의 대단한 기록문화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화는 사초에서 시작됐다. 최초 사화인 무오사화는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넣음으로써 발단이 됐다. 이에 1507년(중종2년) 8한림이 연명하여 사화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김일손 사초의 허실을 논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사가(史家)의 필법이 모두 없어져 만세 공론이 사라지고 전하지 못할까 심히 두려우며, 어떻게 춘추필법이 펼쳐지겠느냐?”고 사초 내용을 연산군에게 고자질 한 대신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의(義)로운 기록자 사관
사관은 실록에 “사신은 논한다”로 대의(大義)를 밝혔다. 명종 때 경연을 언급하면서 “사대부가 자신의 배운 바를 왕에게 진달하는 곳이 바로 경연인데, 경연관이나 국왕 모두 관심이 없으니 후세에 국왕의 덕이 이처럼 예스럽지 못한다한들 무엇이 괴이하겠는가?”라고 비판했고, 단양군수 황준량이 올린 애민 10계책 상소문에 대해서는 “어진 신하라면 이 상소문을 다 읽기도 전에 목이 메게 될 것이다.”라고 의롭게 기록했다.
임진왜란으로 25년간 사초와 시정기를 잃어버린 선조 조정은 역사의 죄인이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춘추관 영사 류성룡을 중심으로 옛 사관들의 기억을 되살리고 관련기록을 수집하여 무엇보다 먼저 불타버린 사초를 다시 만들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임오화변 현장에서 영조는 군졸을 시켜 사관을 끌어내려 했으나 예문관 전임사관 임덕제는 “나의 손은 사필을 잡는 손이다. 이 손을 잘릴지언정 끌려갈 수 없다”며 저항했다.
순조이후 세도정치가 횡행하면서 사필은 꺾이게 된다. 정조실록에 180회 언급되던 사관이 헌종실록에 8회, 철종실록에 11회로 줄어들고 실록도 부실해지면서 나라는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이렇듯 사관은 당대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권계했으므로 국왕이 덕치(德治)를 펼치는데 큰 기여를 했고 왕조가 오백년 왕업을 이루는 동력이 됐다. 그들이 그렇게 권계하고 염두에 둔 대상은 후대, 즉 오늘날 우리였다. 우리를 위하여 조상들은 당대의 사필을 꺾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특별한 피해가 없는 사고본으로 국역화 작업에 동원됐고 지금은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 보관돼 있다.[/caption]
기록의 엄정은 태조에서 시작되고
조선이 개국한 지 3년이 지난 1395년,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과 정충이 고려사 37권을 편찬하여 바치자 이를 흡족해 하며 교서를 내렸다. “임금이란 하늘의 덕을 대신하여 나라를 가지고 역사를 책으로 만드는 것은 일대의 전장(典章,제도와 문물)만을 갖추자는 것이 아니라 후세에 권장하고 경계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대(前代)의 흥망성쇠는 반드시 뒷사람에 의해 사서로 만들어지고 후왕들의 권계(勸戒)가 된다. 다스리게 되면 흥하고, 어지럽게 되면 망하는 것이 이치이니 어찌 전대의 역사를 보지 않으랴. 그러니 옛 일을 거울삼아 앞에 가던 수레를 당연히 경계할지니라.”
태조 이성계는 무인이지만 지혜로운 군주였다. 혼돈의 14세기에 나라를 다시 세워 당대의 지성 집단에게 새 왕조의 설계를 맡겼고 전대의 멸망사를 들여다보고 경계하며 오백년 왕업의 기초를 다졌다. 이 고려사 37권이 세종의 명에 의해 정인지, 김종서가 139권으로 개수하여 오늘날 전해온다.
아울러 태조는 춘추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이 국정을 논할 때 사관이 입시토록 했고, 겸임사관은 각기 보고들은 것으로 사초를 만들고 지방 관아의 중요한 일들을 철마다 보고받아 기록으로 남겼다. 정종 때부터는 국왕의 공부인 경연에 사관이 참석하여 학습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했으니 조선의 왕들은 학업을 등한시 할 수 없었다.
정종의 경연관 조박은 “국왕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과 사필이요, 하늘은 푸르고 높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리(天理)를 말하는 것이요, 사관은 국왕의 착하고 악한 것을 그대로 기록하여 만세(萬世)에 남기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이렇듯 기록의 엄정함은 개국과 더불어 시작됐다.
직급이 낮은 사관
사관의 직급은 매우 낮았다. 7품 이하 참하관으로 전임사관과 겸임사관으로 나누어진다. 전임사관은 왕명을 관장하는 예문관의 여덟 관리로 7품 봉교 2명, 8품 대교 2명, 9품 검열 4명인데 이를 ‘8한림’이라 불렀다. 겸임사관은 다른 업무를 하면서 실록을 관장하는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하고 있어 ‘겸춘추’라 했다. 대표적인 겸춘추는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의 주서(7품)와 가주서이다.
사관은 낮은 직급임에 불구하고 보임이 무척 까다로웠다. 반드시 문과 급제자이어야 하며 문벌있는 가문 출신으로 사조(四祖)에 흠이 없어야 하고 초서로 빨리 써야 하므로 문필이 뛰어나야 했다. 사관을 거쳐야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사필의 전범, 춘추필법
사필은 춘추필법을 전범으로 삼았다. 춘추(春秋)는 공자가 저술한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의 242년 역사서인데 어떻게 쓰여 졌기에 그 필법이 오천년 동양 역사서 저술에 기준이 됐는가?
공자는 고국의 역사서인 춘추를 저술하면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전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을 밝혀 그것으로 천하의 질서를 바로 세우려고 했다. 명분에 따라 용어들을 엄격히 구별했고 스스로 판단하여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였기 때문에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 수 없었다. 공자는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것이요,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춘추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춘추필법은 명분에 따라 준엄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나 감정에 의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기술하는 직필(直筆)을 말하며 옳고 그름을 분명히 따졌다. 그래서 춘추는 유가오경의 하나로 불후의 고전이 됐고 필법은 사서 저술의 전범이 됐다. 오늘날 춘추관으로 그 뜻이 남아있다.
초고 기록 사초
국초부터 왕이 한 말은 좌사(左史)가, 왕이 한 행동은 우사(右史)가 기록한다고 했다. 사관이 입시하지 않으면 대신이라도 국왕을 친견할 수 없었다. 사관이 없는 국왕 친견을 독대(獨對)라 하며 역사상 세 번 독대, 유영경의 정미독대(1607), 송시열의 기해독대(1659), 이이명의 정유독대(1717)가 오랫동안 논란거리가 됐다.
사초(史草)는 초고이므로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만든 후 물에 씻어 종이로 재활용하니 남아있을 수 없는데 현종·숙종 때 승정원 가주서를 지낸 경북 칠곡의 이담명이 쓴 사초가 남아있다. 3년간 사초인데 분량이 161책이나 되며 현종·숙종의 60년 치세 기록인 헌종·숙종실록(96책)보다 훨씬 많다. 초서로 쓴 방대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들어간 내용이 극히 일부분이니 조선왕조의 대단한 기록문화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화는 사초에서 시작됐다. 최초 사화인 무오사화는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넣음으로써 발단이 됐다. 이에 1507년(중종2년) 8한림이 연명하여 사화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김일손 사초의 허실을 논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사가(史家)의 필법이 모두 없어져 만세 공론이 사라지고 전하지 못할까 심히 두려우며, 어떻게 춘추필법이 펼쳐지겠느냐?”고 사초 내용을 연산군에게 고자질 한 대신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의(義)로운 기록자 사관
사관은 실록에 “사신은 논한다”로 대의(大義)를 밝혔다. 명종 때 경연을 언급하면서 “사대부가 자신의 배운 바를 왕에게 진달하는 곳이 바로 경연인데, 경연관이나 국왕 모두 관심이 없으니 후세에 국왕의 덕이 이처럼 예스럽지 못한다한들 무엇이 괴이하겠는가?”라고 비판했고, 단양군수 황준량이 올린 애민 10계책 상소문에 대해서는 “어진 신하라면 이 상소문을 다 읽기도 전에 목이 메게 될 것이다.”라고 의롭게 기록했다.
임진왜란으로 25년간 사초와 시정기를 잃어버린 선조 조정은 역사의 죄인이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춘추관 영사 류성룡을 중심으로 옛 사관들의 기억을 되살리고 관련기록을 수집하여 무엇보다 먼저 불타버린 사초를 다시 만들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임오화변 현장에서 영조는 군졸을 시켜 사관을 끌어내려 했으나 예문관 전임사관 임덕제는 “나의 손은 사필을 잡는 손이다. 이 손을 잘릴지언정 끌려갈 수 없다”며 저항했다.
순조이후 세도정치가 횡행하면서 사필은 꺾이게 된다. 정조실록에 180회 언급되던 사관이 헌종실록에 8회, 철종실록에 11회로 줄어들고 실록도 부실해지면서 나라는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이렇듯 사관은 당대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권계했으므로 국왕이 덕치(德治)를 펼치는데 큰 기여를 했고 왕조가 오백년 왕업을 이루는 동력이 됐다. 그들이 그렇게 권계하고 염두에 둔 대상은 후대, 즉 오늘날 우리였다. 우리를 위하여 조상들은 당대의 사필을 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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