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조의 고전 이야기] 게으름 귀신의 일리 있는 말
AI 요약[편집자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시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사회적 자본인 지식과 경험·노하우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본 코너는 ‘종횡무진포럼·가디언·펄스㈜·한가향 ’이 공동후원 합니다. 게으름 귀신아, 내 말 좀 들어봐. 한날, 성현은 잠을 자던 ...
![[김미조의 고전 이야기] 게으름 귀신의 일리 있는 말](https://img.newsro.kr/wp-content/uploads/2024/04/김미조-3타이틀771-x-434-픽셀.jpg)
[편집자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시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적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칼럼입니다. 사회적 자본인 지식과 경험·노하우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본 코너는 ‘종횡무진포럼·가디언·펄스㈜·한가향 ’이 공동후원 합니다.
게으름 귀신아, 내 말 좀 들어봐.
한날, 성현은 잠을 자던 중 가슴이 돌에 눌린 것처럼 답답함을 느낀다. 정신이 산란한 데다 원기까지 상했어도 몸에 병이 든 것 같지는 않다.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아! 게으름 귀신 때문이구나.’
이때, 성현의 나이는 27세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 영특한 젊은이는 훗날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판서로 대제학을 겸임한다. 또, 학식이 넓고 글씨를 잘 쓴 것으로 이름을 떨치며, 음률에도 밝아 유자광 등과 국악이론서인 악학궤범을 편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훗날의 일이다. 청년 성현은 아주 진지하게 게으름 귀신을 떼놓고만 싶다. 급기야 무당을 불러 게으름 귀신에게 말을 걸 정도다.
“게으름 귀신아. 네가 내 속에 숨어들어 큰 병이 났구나.”
-성현, 조용.
게으름 귀신은 대꾸하지 않는다. 말을 내뱉는 것조차 귀찮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현은 그동안 쌓아둔 말을 풀어낸다.
네가 내게 큰 병이 된 이유를 말할 테니, 너는 자세히 물어보라. 게으른 자는 이로움이 없고, 수고로운 자는 먹을 것이 있다. 편안한 자는 수확이 없고 부지런한 자는 모을 수가 있다. (중략) 그런데 나는 내 일을 게을리하고 그저 노는 것만 일삼았구나. 저 농사꾼을 보아도 1년 내내 바쁘기만 하고, 저 온갖 공인(工人)을 보아도 각기 제힘을 다하는데,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이처럼 하지 않았는가. 게으름을 못 견디어 그저 잠을 자기만 했네. 내가 벼슬길을 살펴보니 권문세가를 쫓아다니던 이들은 마침내 큰 자리를 얻었구나. 나는 그 같이 아니하여, 발이 있어도 나아가지 못하고, 괴롭게 작은 벼슬에 얽매여 세 조정을 지나도 못 옮겼네. 내가 또 세상 사람을 살펴보니, 나날이 재물 구멍만 찾아서 털끝처럼 작은 이익을 다투며 후손에게 물려주려 하네. 나는 그 같이 아니하여 주먹을 쥐고 다툴 줄 모르네.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소박한 생활을 즐긴다네. (중략) 세월을 허송하네. 활이 있어도 다루지 않고, 술이 있어도 거르지 않고, 손이 있어도 세수하지 않고, 머리가 있어도 빗질하지 않고, 뜰이 너절해도 쓸지 않고, 풀이 있어도 뽑지 않고, 의복이 해어져도 꿰매지 않고, 종들이 죄를 지어도 묻지 않고, 다른 사람이 시비를 걸어도 분히 여기질 않네. 내 행동은 날로 성기어 가고, 내 마음은 날로 졸해지며, 내 얼굴은 날로 여위고, 내 말은 날로 줄어간다.
-성현, 조용.
성현은 이제껏 느낀 일들을 줄줄이 읊다가 진짜로 하고자 하는 말을 꺼내고 만다.
무릇 내 허물은 모두 게으름 귀신, 네가 들어와 만들어 낸 것이다. 어찌 나만 따라다니며 귀찮게 구는 것이냐. 어서 나를 버리고 저기 저 낙토(樂土)로 가라. 그러면 내겐 너의 피해가 없고, 너도 네 살 곳을 얻으리라.
-성현, 조용.
성현아, 너도 내 말 좀 들어봐.
고전을 읽다 보면, 사람이 느끼는 바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살피게 된다. 달라진 것은 기술이나 문화, 그에 자연스레 따라붙는 세계관일 뿐, ‘인간의 감정선’은 고스란히 복제된 듯하다. 1만 5천여 년 전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서는 요즘 것들이 버릇없다 탄식하는 내용이, 기원전 1천 7백여 년 전 수메르 점토판에는 요즘 애들을 나무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만 봐도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인간의 감정선엔 큰 변화가 없다. 게으름에 대한 자책도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 이어진 감정선이었을 것이다. 나부터도 그렇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내 게으름을 탓할 때가 있고, 어떠한 문제의 결과에 대한 원인으로 게으름을 지목할 때도 있다. 성현이 게으름 귀신에게 저를 떠나달라 요구하는 말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게으름 귀신의 입장이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떠나달라’는 말을 듣는 당사자이니 제 속말을 뱉어낼 수밖에 없다.
성현아. 그렇지 않다. 내가 네게 어찌 화를 입힐 수 있겠는가. 운명은 저 하늘에 있으니 내 허물로 여기지 마라. 굳센 쇠는 부서지고 강한 나무는 부러지며, 깨끗한 것은 더럼 타기 쉽고 우뚝한 것은 꺾이기 쉽다. 굳은 돌은 고요함으로 이지러지지 않고, 높은 산은 고요함으로 꺼지지 않으니, 움직이는 것은 쉽게 요절하고 고요한 것은 장수한다. 지금 너는 저 풀이나 산처럼 오래 살 것이다.
-성현, 조용.
성현도 게으름 귀신의 말을 끊거나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아마도 성현은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세상에는 시비가 분분하되, 지금 너는 물러앉아 소문이 없다. 세상 사람은 물질에 정신이 팔려 욕심에 날뛰지만 너는 걱정 없이 제정신을 잘 키우니 네 정신에 어느 것이 흉하고 어느 것이 길한 것인가. 유지를 버리고 무지를 이루며, 유위(有爲)를 버리고 무위(無爲)에 도달하며, 유정(有情)을 버리고 무정(無情)을 지키며, 유생(有生)을 버리고 무생(無生)을 즐기면, 그 도는 죽지 않고 하늘과 함께 아득하여 태초와 하나가 될 것이다. 앞으로도 내가 너를 도울 것인데, 도리어 나를 나무라는구나. 너는 네 처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성현, 조용.
게으름 귀신이 말을 끝낼 즈음, 성현은 제 문제의 원인이 게으름 귀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더 나아가 게으름 귀신 덕에 삶을 대하는 자세에 여유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이에 그는 말한다.
“나는 앞으로 내 잘못은 고칠 것이다. 너도 나를 떠나지 말고 함께 살자.”
게으름 귀신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너와 있기로 하지.”
사람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는 게으름 귀신.
성현의 호는 용재(慵齋)다. 용재의 ‘용(慵)’은 게으를 용이다. 재(齋)는 재계할 ‘재’지만 ‘공손하고 삼가다’는 뜻도 지닌다. 자신의 호에다 게으를 ‘용’ 자까지 넣은 것을 보면, 젊은 시절 성현은 게으른 자신을 꽤 못마땅하게 여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제 마음을 다잡아 ‘게으름’의 본질을 곰곰이 생각하고 그 결과물로 수필 ‘조용(게으름이 비웃다)’을 썼을 것이다. 그러니 조용 속 게으름 귀신의 말은 게으름을 성찰한 성현의 말이다. 성현에게 게으름은 ‘권력이나 물질적 부를 쫓고자 애쓰지 않는 여유’, ‘외부의 욕망이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고요히 저를 바라보는 시간’이다. 하지만 내게 게으름 귀신은 ‘죄책감’이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데도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게으름 귀신 때문에 제시간에 작업을 끝내지 못할 때 그렇다.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에 안달복달하는데 눈꺼풀을 덮으려 애를 쓰는 게으름 귀신의 손길을 쳐내지 못할 때도 그렇다. 움직이지 않으면 먹을거리가 생기지 않는다. 무엇이라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숨만 쉬어도 나가는 각종 고정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게으름은 곧 가난이거나 경제적 파탄이다. 이 같은 생각은 자연스레 공포감을 조성하기에 게으름의 또 다른 이름은 두려움이기도 하다. 이를 보건대, 게으름 귀신은 사람에 따라 다른 형상으로 찾아가는 듯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찾아든 게으름의 형상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물었다.
게으름 하면 생각나는 문장을 하나로 말해줄래?
“게으름? 나한텐 숙제야.”
“게으름도 노력이야.”
“게으를 수가 없었어.”
“게으름은 화창한 봄날이야.”
“계획을 지키지 않는 것.”
“지저분하게 사는 것.”
같은 질문에 답은 저마다 다르다. 단 한 사람도 똑같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게으름 귀신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딱 달라붙지만, 그 사람의 정신이나 마음 모양에 따라 다른 형태를 지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내게 붙은 게으름 귀신도 결국 내 마음의 크기가 빚어낸 모습이었을 것이다. 게으름 귀신이 나와 닮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해도 놀랍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사실 진짜 문제는 내 속성을 닮은 게으름 귀신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일 것이다. 성현이 게으름 귀신과의 동거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과 달리 나는 여전히 게으름 귀신을 내게서 떼 내려 바둥거린다.
*김미조 칼럼니스트
김미조는 소설을 쓰면서 인문학책을 기획, 집필하고 있다. 장편소설 『천국의 우편 배달부』로 데뷔했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집 『니는 혼자가 아이다』, 『빌어먹을 놈은 아니지만』 『피노키오가 묻는 말』, 수필집 『엄마의 비밀정원』, 인문서 『국제 분쟁, 무엇이 문제일까.』, 『10대와 통하는 자본주의 이야기』 등이 있다. 또, 포천 문화재단이 주관한 뮤지컬 『화적연-용신과 도깨비 공주의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김미조는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가 가능한 작가로, 앞으로도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김미조 칼럼니스트
김미조는 소설을 쓰면서 인문학책을 기획, 집필하고 있다. 장편소설 『천국의 우편 배달부』로 데뷔했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집 『니는 혼자가 아이다』, 『빌어먹을 놈은 아니지만』 『피노키오가 묻는 말』, 수필집 『엄마의 비밀정원』, 인문서 『국제 분쟁, 무엇이 문제일까.』, 『10대와 통하는 자본주의 이야기』 등이 있다. 또, 포천 문화재단이 주관한 뮤지컬 『화적연-용신과 도깨비 공주의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김미조는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가 가능한 작가로, 앞으로도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기사 정정 신청뉴스제보 jebo@newsr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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